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과 신강 지역 ([[18세기]]~[[19세기]]) == || [[파일:萬國來朝圖 1761.jpg|width=74%]] || ||1761년 청나라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에 묘사된 위구르 및 카자흐 사절단. 일리(伊犁), 카자흐(哈薩克), 우시(烏什), 쿠차(庫車), 카라샤르(哈爾沙爾), 아크수(啊克蘇) 같은 출신지를 한문으로 나타낸 깃발을 들고 있다. ||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장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후이족|회족]] 농민들, 남쪽의 타림분지에 있던 위구르인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다. 준가르족의 거점 중 땅이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처럼 중범죄자들을 이 곳으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마명심 반란을 일으켰다 중가리아로 대거 추방당한 [[살라르족]]이 그 예시.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장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장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후이족|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족들은 [[쿨자시]] 인근에서 직접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은 이렇게 시버족들이 개간한 둔전이 기원이다. 찹찰은 시버족 말로 곡창시대라는 뜻이다.] 원래는 시버족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카자흐 자치주|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장 북부, 과거 준가르족이 살던 곳에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칼미크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인들 이른바 칼미크인들도 러시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장 북부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기나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인들이 이들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인들은 이들의 친척인 준가르인들이 많은 카자흐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굳이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미크인들이 이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려 시도할 리는 만무했다. || [[파일:3ADC2799-BAE7-4D49-8697-9F6172E4E4C5.jpg|width=100%]] || || 카자흐 유목민 || 한편 위구르에 대한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했다. 이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인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인들이 함께 살았으며, 청나라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즉 동투르키스탄 전체는 위구르인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인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의 압제로부터 위구르인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힘들다.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인들은 멸종한 상태이며[* 오늘날 신장에 남아있는 오이라트인들은 준가르인들의 후손이 아닌 칼미키야에서 이주해 온 오이라트인들의 후손이다.] 만주인들은 이 지역에 더 이상 관심도 세력도 없다.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땅인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귀속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청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중가리아의 목초지가 대거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이 지역의 농업 생산량과 인구가 크게 증가하긴 했으나, 과거 준가르 홍타이지국 지배 시절까지도 그럭저럭 돌아갔던 실크로드 무역 체계가 무너지면서 위구르인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다. 17세기까지는 [[알티샤르]]의 상인들이 중동, 인도, 러시아, 시베리아 등과 밀접하게 교역하였고 준가르 칸국에서도 외교 사절들 중 상당수를 이러한 상인들 가운데서 뽑았지만, 청나라는 위구르 상인들의 대외 교류를 상당부분 제한하였다. 위구르인 상인들은 서쪽의 코칸드 칸국 상인들보다 무역에서 불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팔기군 군영에 접근할 수 있었던 한족, 회족 상인들보다도 훨씬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한때, 중세 튀르크어 사전을 편찬했던 바그다드 대학의 교수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까지 배출시키던 이 지역의 유수의 학교들도 유명무실해졌고 '''중세 시대 지식인들로 유명했던 위구르인들은 준가르인들의 잔인한 수탈과 청나라 시절 무역 붕괴의 영향으로 문해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고창회골 시기에는 위구르인 노비들도 계약서를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당시 위구르인 상류층 자제들조차 글을 읽을 수는 있으나 작문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웃한 [[부하라 칸국]]의 경우 [[부하라]]를 중심으로 [[마드라사]]들이 융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학을 원하는 위구르인들은 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따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튀르키스탄에는 [[순니파]] 중 [[하나피파]] [[마드하브]]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 치하에서는 출세의 기준과 이슬람 율법학 지식 수준이 서로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유학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동튀르키스탄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계와 중국 이슬람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지속하였고, 청나라 치세에는 교류가 본격적으로 더 활발해졌다. 중국의 회족들은 이미 명나라 때부터 위구르인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우세하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이 중국에 건너가 쿠피야 수피 교단이 되었다. 위구르 농부들은 밀과 쌀, 여러 가지 과일을 재배했다. 화덕에 구운 [[난(빵)]]과 차를 곁들인 살구, 아몬드, 복숭아, 포도가 주식이었으며 양고기는 주중에 한두번 먹었다. 노령으로 죽은 야크와 말의 고기나 하천에서 잡은 물고기는 비교적 저렴했다. 명절 때는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양의 비계와 당근, 양파를 넣은 쌀밥 폴로우를 먹었다. 준가르 칸국 시절에는 신장에서 생산되는 광물들을 사실상 준가르인들만 독점할 수 있었고, 위구르 농부들은 목재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으나, 이후 철제 농기구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풀리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천산북로에는 준가르 홍타이지국의 농노였던 타란치들이 자유민이 되어 팔기군에게 공급할 말과 소를 사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리, 우루무치, 타르가바타이, 바르콜에는 농경지 외에도 목마장이 들어섰다. 이 외에도 신장에서는 이웃한 카자흐인들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부족한 군마를 보충하였다. 호자 형제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무슬림]] 위구르인들은 비무슬림 [[청나라]]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나라 때 위구르인들이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다르게 청나라 때 신장은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위구르인들이 몽골인이나 한인에 비해서 많이 하대받았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회족들(한족계 무슬림들)도 신장 인근의 감숙성에서 수피 지도자 마명심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감숙성과 섬서성 역시 가난한 변방으로 전락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지배 동안 이곳에서는 무슬림들에 의해 무려 42차례의 봉기와 국지전이 일어났다. 하미에서는 만주 팔기군 일부가 위구르인들을 괴롭히고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와중에 위구르인 10,000여명이 학살당했다. 무슬림들만 봉기를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다. 신장으로 유배된 한족 범죄자들 역시 종종 봉기를 일으켰는데, 1768년 한 번은 술취한 청나라 관리가 유배지에서 둔전을 경작하던 한족 농민들의 부녀자들을 희롱하자, 한족 농민 1천여 명이 우르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청나라는 반란 우려 때문에 위구르인들에게 광산에서 노역시키는 일은 자제했고, 대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신장에 광산으로 파견하였다. 청나라 본토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장 둔전에서 5년, 광산에서 8~10년을 일하면 사면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1820년 '호자 형제' 부르하누딘의 손자인 자한기르 호자(جهانگیر خوجا)가 파미르를 넘어 진격하였다. 1826년, 자한기르는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야르칸드,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하며 한족들과 회족들을 노예로 납치하였다.[* 이렇게 납치되어 중앙아시아 각지에 노예로 팔린 한족이나 회족 후손들은 [[둥간족]]의 기원이 되었다.] 청나라의 팔기군은 파미르 산중에서 자항기르를 1827년 처형하는 등 분전했지만 신장의 한족 상인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당하며 일부 지역에서 행정이 마비되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청나라 조정은 결국 1832년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관세를 일방적으로 [[코칸트 칸국]]에 유리하게 조정하고, 코칸드 상인의 치외법권을 보장하며 매년 은전 12,500~50,000냥을 보조금으로 받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청나라가 맺은 사실상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 조정은 굴욕적인 조약에 대한 반발과 민심의 동요를 덮기 위해서 코칸드 칸국 병사 6만명을 사살했다는 거짓 전과를 공표했기 때문에, 강남의 한족들은 청나라가 이런 불평등 조약을 맺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청나라 입장에서는 보급이 힘든 신장 지역으로 대군을 파견하는 것 보다는 보조금을 조금 떼어주는 것이 더 남는 장사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만주족의 청나라는 전임자인 준가르 홍타이지국이나 후술되는 [[야쿱 벡]] 및 한족 군벌들에 비교하면 위구르인들에게 확실히 더 나은 수준의 선정을 베풀었다. 비교하자면 청나라의 남쪽 [[먀오족]]이나 [[야오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한족 농민들이 남방 소수민족 [[화전(농업)|화전민]]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 싸움이 벌어지면 팔기군이 직접 출동하여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하면서 소수민족들을 점점 산간벽지로 밀어넣은 것과 다르게, [[타클라마칸 사막]]이 위치한 신장 지역은 자발적으로 이주해오는 한족 인구가 거의 없다보니 청나라 입장에서 위구르인들에게 잘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입장에서 신장 지역은 경제 식민지라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 보조금을 보내 뿌리는 방식으로 경제가 운영되었다. 신장 지역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청나라 기준으로 인구 밀도가 희박하여 세입이 항상 부족한 편이었다. 청나라 조정에서 보내주는 막대한 양의 보조금이 아니면 이 지역에 주둔한 팔기군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없었다. 19세기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자 장강 이남에서 거두어 신장으로 보내는 보조금이 점차 삭감되고 지연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도광제]]에서 [[함풍제]] 치세로 이어지는 시점이던 1850년에는 신장 지역의 만주 팔기 기인들에게 보조금을 삭감할테니 ~~어차피 훈련 안 하고 놀거면~~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