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신장성 건성 === 청나라는 처음에는 이 지역을 포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흠차대신 [[좌종당]]이 이 지역을 포기한다면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며 원정을 강행하였다. 오스만, 러시아, 영국은 야쿱 벡 정권에 최신 무기를 지원했으나, 무능하고 단순한 야쿱 벡의 상대는 바로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역전의 노장으로 회민 반란군을 전멸시키지 않고 용서하고 포섭하는 정책으로 조기 진압한 좌종당이었다. 야쿱벡은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하는 [[탈레반]]식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같은 무슬림인 회족들은 탄압하는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을 펼쳤다. 회족 뿐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화 정책으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사이에서도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현지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인은 모든 종교에 관대했던 유목민이었고 정체성을 이슬람에 두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키는데 거기에 돌직구를 던졌으니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2019년 [[터키]]의 집권당과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슬람 원리주의자이지만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철폐하지 못하는 게 이 때문이다.] 청나라 조정은 위구르인들을 안정시키는데 나름 노력했으나[* 물론 예외로 투르판에서 만주족이 위구르인 부녀자 수백명을 납치하고, 투르판의 위구르인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오히려 위구르인 1만 여명이 반란군으로 몰려 학살당하는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애초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것을 생각하고 팔기군 기지를 대부분 위구르인 거주지와 최대한 분리시켜 놨다. 사실 팔기군 주둔지는 대부분의 중국지역에서 일반 중국인 거주지와 분리되어 있었다. 위구르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장의 경우는 다른 중국지역과 달리 분리가 한족/만주족 이 아니라 한만/위구르 식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야쿱 벡의 반란 세력은 일단 기원이 용병에 불과해서 국가통치 경험이 청에 비해 부재했고 일종의 모험 결과로서의 국가 성립이라 청에 비해 체계적인 국가이지도 않았다. [[파일:F8FF5799-F2CF-4484-B782-7A49A106CE00.jpg]] 청나라의 신장 지배 당시 자치를 누리던 많은 위구르인 토후들이 야쿱 벡의 지배에 반발했는데, 그중 한 명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쪽 입구 부분에 해당하는 [[하미시|하미(쿠물)]]의 칸이었다. 감숙, 섬서 반란을 진압한 [[좌종당]]의 사병들이 신장을 재정복하기 위해 진입하자 하미의 칸은 이에 적극 협조하여, 좌종당의 한족 민병대가 신장 기후에 적응될 때까지 충분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까지 줘가며 식량을 보급해주었다.[* 야쿱 벡을 제압하고 신장을 '''재점령'''한 [[좌종당]]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하미의 술탄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며 자치를 누릴 권리를 하사했는데, 하미의 술탄과 그 자손들은 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둬도 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나머지 하미의 위구르인 농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했다. 이후 하미에서는 1930년대까지 계속해서 폭동과 소요가 일어나게 된다.] 1876년, [[하미시|하미(쿠물)]] 근방의 둔전에서 훈련을 마친 좌종당 군은 야쿱 벡이 청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이겠답시고 어리석게도 발포 중지 명령을 내린 틈을 타서 위구르의 중심도시 [[우루무치시|위륌치]]를 탈환했다. 야쿱벡은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강화하려 했으나, 좌종당 군은 야쿱벡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신장 전역이 러시아나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협상을 무시하고 [[투르판시|투르판]]을 함락시키며 계속 진군하였다. 위구르인들의 독립 정권이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내외몽골의 몽골인들도 러시아의 입김을 받아 동요할 수가 있어 만주, 그리고 북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에 청의 입장에선 반드시 막아야 했다. 오늘날에 중국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은 [[중화사상|중화주의]] 때문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독립은 '''[[중화제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야쿱벡은 추격하는 청나라군을 피해 중앙아시아 깊숙히 도주하던 중 홧병을 얻은 탓인지 급사했다. 이것으로 야쿱 벡의 예티사르 왕국은 청군에게 멸망하고, 야쿱벡의 미성년자 아들들은 청나라에 잡혀 [[거세]]후 환관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강은 1876년 다시 청나라의 영역이 되었으나, 1871년 러시아 제국이 이미 신장 북서부의 이식쿨 호수와 일리 강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장악한 이후였다. 청나라는 러시아 제국이 점거한 신장 영토를 돌려받기를 원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중추지인 일리를 병탄하려 했고 쿨자의 위구르인들과 [[둥간족]]들이 한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해 러시아 제국의 잔류를 요청한 것을 계기로 리바디아 조약에서 일리를 반환하는 대신 호르고스강과 테케스강을 국경으로 일리의 10분의 7을 러시아에 할양하는 지경까지 몰렸다가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쿨자 남부 일대만을 간신히 돌려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발하슈호]]와 [[일리 강]] 유역 서부는 반환되지 않고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영토로 남게 되었다. ||[[파일:2237BB6C-553E-4E9F-AAAA-1E8F94D803B2.jpg]]|| || 청나라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간 신장 북서부 지역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의 동부 영토로 귀속되었다. || 야쿱 벡의 예티사르 반란 이후 좌종당은 이 일대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동북 지역이나 다른 번부들과 마찬가지로 당국의 직접적인 행정력이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직접통치를 할 수 있는 행정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신강 일대를 정복한 이후 준가리아 일대를 준부(準府), 또는 천산북로(天山北路), 타림 분지 일대를 회부(回府), 또는 천산남로(天山南路)라고만 명명할 뿐, 중국 본토에 직접통치를 위한 [[성(행정구역)|직성]]을 둔 것과 달리 별다른 행정기관을 두지 않았는데 [[1884년]] [[쿨자]]의 일리 장군부를 철폐시키고 준부와 회부를 통합해 [[우루무치|디화]]를 수도로 삼는 '''[[신강성]]'''(新疆省)을 설치한다. 둥간 봉기와 감섬회란 와중에 신장과 감숙성을 잇는 도로망과 숙박 시설들도 대거 파괴되었고 그 빈자리는 좌종당이 데려온 산서성의 한족 상인들이 메꿨다.[* 신강성은 [[1912년]] 청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때까지 내려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전환된다.] 좌종당은 전략과 전술 방면에서는 뛰어난 인재였을지는 몰라도 [[양무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처럼 수구 유학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는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무가치한 적폐로 간주하고 위구르인 아이들에게 유교 경전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서당들을 신장 각지에 설치했는데, 해당 학교들은 언어 소통 문제로 당연히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좌종당이 설치한 기숙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은 위구르어를 잊어버려서 부모랑 대화할 수가 없었다 하며, 위구르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능한한 터키인이나 러시아의 [[카잔(러시아)|카잔]]에서 [[볼가 타타르인]] 교사들에게 맡겨 서구 최신 학문과 이슬람 학문을 동시에 배우게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전통 위구르 학교에 몰래 보내는 편을 선호한 것. 좌종당이 설치한 서당들은 20년 동안 간신히 한문을 읽을 순 있지만 한어 작문은 거의 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졸업생들만 양산하자 좌종당의 뒤를 이어 신장을 통치한 양쩡신은 유학 학교들의 지원금을 무자비하게 삭감하며 사실상 좌종당의 교육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서당들을 폐교시키는 정책을 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