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흉노 연맹의 오른팔 === ||[[파일:Centum_Satem_map.png]]|| || 파란색 부분은 켄툼어군 Centum, 빨간색 부분은 사템어군 Satem. || 고대에는 인도-유럽계 토하라인들과 [[사카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토하라인과 샤카인 모두 백인종이긴 했지만 사용하는 언어[* [[토하라어]]는 켄툼어군에 속하며 사카어는 사템어군에 속했다.]나 문화는 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 사료에 나오는 [[월지]]와 토하라인이 동일한 민족이라고 본다. 토하라인들은 [[알타이 산맥]]과 [[예니세이 강]] 분지에서 신장 지역을 넘어 [[간쑤성]] 일대로 남하하였는데 [[둔황]]과 치롄 산맥을 중심으로 [[강족]]과 교역하였다. 기원전 2세기 흉노 연맹의 [[묵특선우]]가 월지를 공격하면서 토하라인 상당수가 [[일리 강]]과 [[추 강]] 유역으로 밀려났다. 다시 흉노족들이 이들을 추격하여 공격하자 이들을 [[아무다리야 강]]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하였는데 이들은 중국 사료에서 "대월지"라고 칭해진다. 원래 일리 강과 추 강 유역에 거주하던 이란계 사카인들([[오손|오손(烏孫)]])은 월지족 피난민들의 공격을 받아 고향에서 쫓겨난 이후 남서쪽으로 멀리 이주하여 [[인도-스키타이]]가 되었고 일부는 타림 분지 서부로 들어와 [[호탄]]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다른 한편으로 토하라인들이 흉노족을 피해 이주하는 과정에서 낙오한, 이른바 “소월지” 족은 타림 분지 동부의 오아시스를 따라 정착하며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 일부는 오늘날의 칭하이성 방향으로 피난하여 강족과 동화되어 [[노수호]]로 이어진다.] 토하라인들과 샤카족들이 세운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은 [[흉노족]]에 복속했고, 그 때문에 중국의 한나라도 기원전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무제]] 시절 [[장건]]의 보고에 의해 흉노가 이 지역에서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과 교역을 하거나 조공을 받으며 많은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나라]]는 흉노족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 '''흉노의 오른팔을 자른다.'''[* 흉노의 왼팔로 여겨지던 세력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조선]]''', 고조선 역시 한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는 계획 아래 이곳으로 이광리 장군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군마를 징발하고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에서 흉노 주둔군을 몰아냈다.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생산되는 농산품과 공물은 흉노에게 필수적이었다. 반면 한나라는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흉노를 견제하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이곳을 침공하였다. >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 > 『사기』 위현전 후대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당시 한나라의 [[타림 분지]] 영토에 살던 주민들이 중국어의 방언을 사용하는 한족의 일파이며, 한나라의 통치가 소위 [[왕도]] 정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 한나라의 서역 침략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대로 타림 분지 일대의 주민들을 제3자로 삼아 흉노 연맹과 한나라 사이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양상이었다. [[한혈마 전쟁|이광리의 서역 원정]] 당시 보급 문제로 이 지역에 원정나간 한나라 군인들은 대부분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막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현지인들의 비협조 때문에 보급이 너무 힘들어지자 궁여지책으로 한나라는 죄수들과 고아들을 서역 영토에 주둔군으로 정착시키고 [[둔전]]과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둔전]] 경작은 타림 분지에서 장안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급에 비용이 너무 많이 나가는 문제[* 보통 중국의 왕조들이 중앙아시아로 원정을 보낼 경우 소와 말이 먹을 건초와 병사들이 먹을 군량 보급 문제로 100일 이상의 원정 계획을 짜는 건 사실상 자폭 행위나 다름 없었다.] 때문에 만들어낸 방식인데, 비용 절감 효과가 확실하다는게 입증돼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중국 전역에 확대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한나라의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시점인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이식쿨 호 근방에까지 둔전이 한 곳 설치될 정도였지만, [[후한]] 시대에는 오늘날의 [[하미]] 근처의 둔전 하나만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고고학을 통해 분석해 보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쿠샨 왕조]]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강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쿠샨 왕조 측에서는 한나라와 다르게 자세한 역사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쿠샨 왕조는 박트리아를 점령한 대월지족이 기원이 된 북인도-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다. 1세기 후반경부터 3세기 말까지 쿠샨 제국은 타림 분지에서 한 때 한나라가 누렸던 것과 동등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쿠샨 제국에서 사용된 카로슈티 문자로 된 문서들이 호탄과 니야에서 발견되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하고자 [[반초]]를 보내 이 지역으로부터 조공을 다시금 징수하는 데 성공했다. 반초가 귀환한 후 서기 102년이 되자 한나라는 서역에 투입시킨 병력을 감축하였고, 이로 인해 타림 분지 일대는 107년부터 125년까지 다시 한번 북흉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반초의 아들 반용이 뒤를 이어 이 일대를 다시 정복함으로서 한나라는 다시금 127년부터 15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타림 분지 일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한다. 이후 후한말 [[위진남북조]]의 혼란으로 한의 서역 통치는 방치되었으며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부견]]이 일으킨 서역 원정 등과 같이 중국의 서역 영향력은 간헐적으로 미친채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