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 === [[성스차이]]가 쿠데타로 진수런을 몰아낸 이후에도 마중잉을 비롯한 여러 회족들이 우루무치를 공격해왔다. 당시 소련은 [[마중잉]]이 일본과 커넥션이 있다는 의심을 품었는데, 실제로 마중잉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일본인이 한 명 발견되었던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무슬림 봉기([[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A%A4%EB%A7%88%EC%B9%98_%EC%9A%B4%EB%8F%99|바스마치 운동]])를 진압하느라 진땀을 뺀 적이 있었던 스탈린은 당시 소련 중앙아시아 영토와 인접한 신장에 친일 군벌정권이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장왕 성스차이와 소련 사이의 윈윈이 이루어졌다. 성스차이는 중국인으로서 중국 공산당 대신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성스차이는 한동안 국민당-소련 사이에서 반독립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위구르를 '''동튀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합병]]시키려 하였다. 만약 소련에 위구르가 합병됐다면 소련의 일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해체]] 때 옆동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함께 [[동튀르키스탄]]으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친소 성스차이 정권은''' 상술한 세르게이 말로프의 도움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족 분류법을 신장에 도입하는데, 이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 이후 중국 전역에서 여러 소수 민족을 분류하는 방식의 근간이 되었다.''' 공산당과 대립하던 국민당은 쑨원의 [[오족공화]](한족,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인, 회족 이렇게 다섯 민족이 모두 단합해야 한다) 이론의 바탕을 둔 소수민족 정책을 세웠으나[* 좋게 말해서 오족공화이고... 소수민족에게 적대적이던 중화주의자 장제스는 당시 중국 영토 내 모든 민족들을 억지로 다 상술한 5족 분류에 우겨넣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강요하였다.], 성스차이는 당시 여러 민족들이 얽혀살던 동투르키스탄 상황에 맞추어 신장성 내 거주민들을 14개 민족[* 위구르, 타란치,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타르, 타지크, 만주족, 시버족, 쒀룬족(다우르족), 한족, 회족, 몽골족, 러시아인]으로 분류하였다. 성스차이 이전 중국인 관료들은 튀르크계 농민 무슬림들을 회족들과 구분하기 위해 전두(纏頭)[* 둘러쓴 머리, 덮어쓴 머리 정도의 뜻]라고 불렀다면 성스차이 정권 시절부터 이들은 전두라는 [[멸칭]] 대신 공식적으로 위구르족이라는 민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구르라는 민족명은 1921년도부터 [[이슬람 모더니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던 말이었지만, 해당 어휘를 공식화한 것은 성스차이였다. 성스차이는 14개 민족 분류를 바탕으로 각 민족들에게 신장성 의회의 대표권을 할당하는데, 당시는 아직 위구르인 인구가 한족 인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혹은 소련처럼 [[레닌주의]] 방식에 입각한 민족 자치구역 할당까지는 진행되지 못했다. 성스차이 그 자신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이었지만, 신장성 곳곳에 스탈린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놓게 하는 등의 노골적인 아첨 행각으로 엄청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성스차이는 소련과 관계를 틀때부터 미리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책을 구해와서 서가에서 눈에 제일 잘 띄는 곳에 진열해놓고, 소련에서 우루무치 주재 총영사로 파견한 [[https://en.wikipedia.org/wiki/Garegin_Apresov|가레긴 아프레소프]]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던 전과가 있었다. 그는 소련에 [[석유]]와 [[텅스텐]], [[망가니즈|망간]], [[주석(원소)|주석]], [[우라늄]] '''채굴권'''을 팔아먹었고, 1937년에는 과거 아첨을 바치던 대상에서, 신장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던 라이벌이 된 가레긴 아프레소프를 체포하여 소련으로 압송시킨 이후 스탈린의 충실한 꼬봉 노릇을 하게 되었다. 성스차이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아프레소프는 1941년 오룔의 한 수용소에서 총살당한다. 성스차이는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싫어하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스탈린이 보낸 부하들을 정리할 때,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후 처형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소련에서는 신장을 소련에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해 소련 중앙아시아 영내에 살던 중국계 무슬림들인 [[둥간족]] 공산당원들을 신장으로 파견하였는데, 성스차이는 이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면서 모조리 숙청했다.] 비교하자면 성스차이의 라이벌 아프레소프는 칠칠치 못하게도 백군 난민들을 숙청할 때 일본 스파이라는 덜 면밀한 누명을 씌워서 죽였었다.[* 스탈린은 마중잉이 친일파라고 의심했는데 우루무치와 일리의 백군 난민들이 마중잉과 싸우던 상황에서 외려 이들을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죽였으니, 공산당 고위 간부들 입장에서는 아프레소프가 [[니콜라이 예조프]] 같은 부류로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신장에 처음 왔을 때 도와줬던 스웨덴인 선교사들을 1938년 추방하고, 현지 위구르인 유력자들에게 자신이 이슬람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줄 요량에서인지 [[기독교]]로 개종한 극소수의 위구르인들을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붙여 교수형 시켰다. || [[파일:5349ABAA-ED95-4E09-9F87-F70C5E937191.jpg|width=100%]] || || 스웨덴인 선교사(왼쪽)와 러시아 백군 난민 가정. 당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러시아 백군 출신 군인들을 지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 명목상 국민당 정권에 충성하던 성스차이는 소련하고만 줄타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끌어들었다. 옌안의 있는 중국 공산당에 접근한 그는 [[마오쩌민]]을 비롯한 공산당원 수십명을 받아 신장 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이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망을 가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스차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친교 관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을 꿀보직인 '''재정청''' 부청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던 중 [[독소전쟁]]이 벌어지고 소련이 전쟁 초반부 나치 독일에 대패하자, 그는 갑자기 반공을 외치며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소련인 고문과 마오쩌민을 처형하고]] 국민정부에 접근했다. 그러다가 국민정부가 자신의 이권을 박탈하기 시작하고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이후 부활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 같자 다시 소련에 접근했다. 성스차이는 스탈린에게 "잘못했으니까 다시 꼬붕짓 할테니 한번만 봐주셈"이라고 편지를 보냈으나, [[성스차이]]의 배신 행위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소련은 그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고, 화가 난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농업부장에 임명하는 형식으로 신장성장에서 해임했다. 그가 신장에서 얼마나 해먹었는지 50개의 트럭에 온갖 사치품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결국 친소련 군벌 통치하에 있던 동투르키스탄은 [[중화민국/국민정부|국민정부]]로 귀속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