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제2공화국과 장즈중과의 협상 ==== 상황이 심각해지자 장제스는 서북 군사령부의 사령관을 역임한 [[장즈중]]을 우루무치로 파견하였다. 국민당과 일리 정부 사이의 협상은 수개월이 걸렸는데 1946년 7월이 되어서야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을 주도했던 장즈중은 그동안 신장성을 지배했던 군벌들이 탐욕스럽거나 혹은 중화주의에 집착했던 것과 다르게, 청렴하면서도 온건한 인물이었다. 장즈중은 "우리 중국인들은 신장 인구의 단지 5%만을 구성하고 있다. 왜 우리는 나머지 95퍼센트를 이루고 있는 위구르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정치권력을 넘겨주지 않는가?"라는 말과 함께 신장 주민의 대다수가 한족이 아니라는 사실 외에도 장제스의 중화주의 가치관이 신장에 먹히지 않는 다른 사실을 인정했다. 장즈중은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무함마드 에민 부그라,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ئەيسا يۈسۈپ ئالپتېكىن, Isa Yusuf Alptekin), 마수드 사브리를 초청하여 신장성 연합 정부의 각료로 임명하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장즈중은 신임 신장성 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아흐메트잔 카시미는 부주석이 되었으며, 신장에서는 언론과 출판에서 검열이 완화되었고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위구르어와 카자흐어가 사용되었다. 장즈중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수립 이전 과중했던 징세를 대폭 경감한 것은 물론 가난한 농민들에게 저리 대출을 시행하였으며, 비한족과 한족 공무원의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하는 작업을 시행하여 지역 행정의 형평성과 효율을 높였고, [[부르한 샤히디]]가 위구르어-중국어-러시아어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지원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과 신장의 장즈중 정권이 공존하던 시기는 짧았지만 그 유산은 적지 않았는데, 근대부터 이어져왔던 위구르인/카자흐인들의 [[이슬람 모더니즘]] 교육 운동이 이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 주민들은 한족에 비해 소득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 교육 수준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경우가 많았다. [[2000년]] 중국에서 발표한 민족별 문맹률과 교육 수준 자료를 보면 15세 이상 한족 평균 문맹률은 8%, 소수민족 평균 문맹률은 14%였던 반면, 신장에 주로 거주하는 타타르족은 1.8%, 우즈베크인은 2.5%, 카자흐인은 2.6%[* 원래 유목민이면 문맹률이 높아야 정상이지만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시절 소련의 교육 인프라가 도입된 혜택에 힘입어 교육 수준이 한족보다 높았다.], [[시버족]] 2.7%[* 시버족의 경우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의 혜택과는 별개였으나 오히려 중국 본토의 만주족들보다도 문맹률이 더 낮았다.]로 심지어 조선족(문맹률 2.8%)이나 만주족(문맹률 5%)보다 문맹률이 낮은 걸로 나왔다.[*출처 중국소수민족연구 (주)한국학술정보] 같은 통계에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의 경우 문맹률은 한족과 비슷한 것으로 나왔다. 오늘날 중국 내 위구르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의 소득 수준이 한족 평균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서구권이나 인도에서는 무슬림 소수민족들이 비무슬림들에 비해 평균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눈에 띄는 차이이다. 비교하자면 [[마부팡]] 군벌이 통치하던 [[칭하이성]] 역시 적극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음에도 불구 티베트인과 회족의 문해율 문제가 신장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같은 2000년 통계에서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무슬림 [[살라르족]]의 문맹률은 49% [[간쑤성]]의 몽골계 무슬림 [[둥샹족]]은 63%에 달했다. 비교를 위해 첨언하자면 같은 기간 기준으로 발표한 통계에서 티베트인은 문맹률 40%대, [[후이족|회족]]은 문맹률 17%, [[러시아계 중국인]]은 3%로 조사되었다. 장즈중은 자신이 발언했던 바 그대로 동튀르키스탄 현지 무슬림 주민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국민당 측에서는 이를 두고 장즈중이 소수민족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친소파라고 매도하며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위구르인들 중에서도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인물들이 그에게 협조를 바쳤지 그를 의심하는 위구르인들이 적지 않았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은 신장성 북부의 3개 지구에서 독자적인 화폐제도와 군대를 유지하는 사실상 독립적인 정체 체제로 남아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장즈중은 1947년 5월부로 마수드 사브리에게 주석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하였다. 장즈중의 든든한 뒷받침 없이 주석이 된 마수드 사브리는 취임 이후 국민당의 강경 중화주의자 송시롄 장군에게 견제를 받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949년 1월 마수드 사브리가 퇴임하고 [[부르한 샤히디]](بۇرھان شەھىدى, Burhan Shahidi)가 신장성 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샤히디는 이후 신장에서의 국민당과 공산당 통치 사이의 전환기를 주재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