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중국으로의 불교 전파 ===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은 [[마니교]] 경전에서 "[[쿠처시|쿠차]]와 [[카슈가르]]에서 코초와 베슈발리크에 이르는"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쿠샨 왕조의 초기 이름이랑 헷갈릴 수도 있는데, [[토하리스탄]]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토하라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불교를 중국에 처음 전파한 사람들은 바로 이 토하리스탄 사람들이었다.[* 중국 불교 초기의 도래승 가운데 인도에서 직접 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중국 불교의 초기 전래는 인도 불교 그대로가 아니라 당시 이미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가 이식된 것이기도 했다. 그 영향이 아직도 동아시아 불교계에 남아있는데, 이를테면 사문, 외도, 출가, 십이인연설 같은 한자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토하라어 등 중앙아시아 언어에서 번역된 것이다. 소련의 학자 보리스 A. 리트빈스키(Boris A. Litvinsky)에 따르면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기록된 인물 중 여섯 명은 인도인이었고 일곱 명이 중국인이었으며 열여섯명은 중앙아시아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불교 승려들은 '해설'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용어인 위바사(Vibhasa) 식의 글쓰기를 선호했다. 서기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는 [[간다라]]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로프누르 호]] 근방에 정착한 후, '''크로라이나'''(Kroraina) 왕국을 세우고 이 지역에 카로슈티 문자를 보급했다. 인도에서 도입한 문자가 널리 쓰임과 동시에 타림 분지 곳곳에 불교 경전이 보급되고 불교 사찰에 기반을 둔 초기 형태의 학교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흉노족과 선비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사이에 [[에프탈]]족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중국과 이 지역이 모두 유목제국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인도와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경제/문화 교류가 무척 활발해졌다. 소그드인들은 에프탈족의 영토 넘어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둔황을 넘어 장안과 낙양까지 진출하였다. 둔황 근처 [[옥문관]] 근처에서 서기 313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그드어로 쓰여진 편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사업상의 내용 외에도 흉노에 의해 낙양이 약탈된 소식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란한 사건과 교역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모든 편지들은 규격화된 형태로 주소가 적혀 있고 포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마르칸트, 호탄, 누란, 둔황 및 다른 지역에 있는 소그드인들이 기존의 우편 체계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편 [[오호십육국]] 시대 중국에 유입된 여러 유목민족들은 한족과 비한족 간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했다. 수많은 중동, 중앙아시아 출시 승려들이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환영을 받으며 불경을 한역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쿠처시|쿠차]] 출신의 [[쿠마라지바]][* 대승 불교를 믿던 인도 출신 아버지와 설일체유부 부파불교를 믿던 쿠처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다. 금강경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하다.]를 들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불교 경전 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아직 완료되지 못한 시점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불교 교파는 경전 독서와 공부가 중심이 되는 [[교종]] 불교였다. 쿠마라지바의 고향, "구자국"으로도 알려진 '''쿠차'''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한서]]에는 서기 2세기 인구가 8만에 달하는 도시라고 기록되었으며, 진서(晉書)에서는 3~4세기 쿠처에서 불교가 번성한다는 기록이 있다. >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은 3중으로 되어있다. 불사와 불탑이 1,000여개소에 달한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며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머리는 모두 목까지만 기른다. 왕이 사는 궁전은 마치 귀신이 쌓아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리으리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6세기 이 쿠차를 방문한 [[현장]][* 쿠마라지바와 함께 불경 번역사업의 크게 기여함]은 불교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대해 다소 미화된 기록을 남겼다. > 이곳은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 알맞으며... 훌륭한 포도와 석류, 자두, 배, 복숭아와 아몬드가 생산된다... 근처의 금과 구리와 철, 납과 주석 광맥이 풍부하다. 공기도 좋은 곳이며 사람들은 행실이 정직하다... 천축(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조금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현악기와 피리를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루며 비단에 자수를 놓은 의복을 주로 입는 등 여러모로 풍요로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5,000명 이상의 출가자들을 가르치는 100여 개의 사찰이 있다. 소승 불교를 주로 믿으며 교리와 계율은 천축국의 그것과 같다. [[파일:2C56569E-7E23-4E4E-BA7B-88F66BEF2B30.jpg|width=460]] [[파일:6D09A897-2C14-4793-B3BF-F9FAF5DFFBFD.jpg|width=460]] 쿠차 인근의 키질(Qizil) 동굴의 석굴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키질 석굴은 동굴을 파내고 그림을 그려 성소로 이용하는 인도의 전통이 중앙아시아로 확대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사원 형태의 다른 예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탈레반이 바미얀 불상을 파괴하기 앞서 불화들을 화염방사기로 반달했다.], 투르판 분지의 베제클리크, [[둔황]], [[룽먼석굴]] 등이 있다. 토하리스탄 쿠처에서 부파 불교를 믿고 [[팔리어]] 원전의 [[설일체유부]] 경전과 [[자타카]][* [[팔리어]] 경전에 여러 가지 설화를 주석삼아 덧붙인 이야기 모음집]를 공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인도-스키타이|사카족]]이 살던 '''[[호탄]]''' 왕국에서는 대승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반야부 경전을 주로 공부하였다. 호탄을 방문한 중국인이나 신라인 승려들은 이 곳 주민들이 삼보를 매우 공경하여 집집마다 집 앞에 불탑을 조성하고 큰 사찰만 14개에 작은 사찰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호탄의 왕족들은 둔황의 한족이나 소그드인 유력자들과 자주 통혼하였으며 둔황과 룽먼 석굴 조성에 직접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 구살단나(Kustana, 호탄의 산스크리트어 이름)국은 모래와 돌이 태반이고 토양이 있는 곳은 조금뿐이다. 토양이 비옥하여 갖가지 과일이 많다. 이곳에서는 '''품질 좋은 면제품이 나오고''' 백옥과 예옥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의 성질은 예절바르고 온순하며 학예를 좋아하면서도 음악도 발달했다. '''가죽옷이나 모직물을 입은 사람은 드물고 면직물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 천축국(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변형해서 쓴다. ... 사찰은 100여 개에 승도는 5,000여 명에 달하며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 호탄 왕국은 중국의 둔황과 교류하기 앞서 인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들은 크로라이나 왕국과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인도의 카로슈티 문자를 변형시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도입한 면직물을 생산하며 번영을 누렸다. 호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산스크리트어로 "땅의 젖"이라는 이름의 "쿠스타나"(Kustana)로 칭했다. 중국보다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와 교류가 많았던 호탄 왕국이었지만, 불행히도 고대 중앙아시아 역사 기록은 대부분 중국인이나 그리스인에 의해 기록되었던 바, 호탄 왕국의 역사와 생활상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는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가 서로 공존했던 것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부파 불교가 잘 도입되지 못하고[* 다만 부파 불교 경전은 [[아함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긴 했다.] '''도교와 융화가 가능했던 대승 불교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널리 전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