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돌궐, 당, 티베트, 이슬람 칼리프조 ===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는 경쟁상대였던 [[돌궐|동돌궐]], [[서돌궐]] 제국을 쳐부수고 튀르크계 번장과 번병들을 활용하여 투르판 분지와 타림 분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호탄]]의 우전도독부, [[카슈가르]]의 소륵도독부, 카라샤르에 언기도독부를 설치한 후 [[쿠차]]에 설치한 [[안서도호부]][* 원래는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고창국]]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인구가 더 많고 중요도가 높은 쿠처로 이동.]로 하여금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 영토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를 "안서 4진"이라고 했다. 또 정주에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튀르크계 유목민을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이 지역 토하라계 도시 국가의 음악이 당나라로 수입되어 당나라의 음악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타림 분지 주민 중에서 절반 이상이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으며, 서역 악기 상당수가 당나라로 수입되어 중국 악기 개량에 영향을 주었다. 서역인 무용수를 뜻하는 호희, 서역 춤을 뜻하는 서역무 역시 당나라 고위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 [[파일:1E89D278-F930-43E7-9A86-4D2C4CB7D584.jpg|width=100%]] || || 당나라의 구법승과 이를 호위하는 소그드인 병사, 서역 지역의 당군의 상당수는 돌궐족과 [[소그드인]]으로 구성되었다. || [[티베트|토번]]이 654년대부터 676년까지 이 지역으로 팽창하며 타림 분지를 점령하고, 우전도독부와 소륵도독부를 파괴하자, 당나라 조정은 황급히 안서도호부 본진을 다시 '''[[투르판시|투르판]]'''의 [[고창국]]으로 옮겨야 했다. 당나라가 지배할 당시의 투르판 주민들은 망자에게 입힐 옷과 모자, 신발을 주로 재활용 종이로 만들었는데, 투르판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망자의 옷으로 만들었던 여러 문서들 관청에서 쓰고 버리던 서류 및 계약서, 약 처방전, 학교 교재 등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종이 중에는 [[마니교]] 경전도 있었는데, 여태 수수께끼에 쌓여있던 마니교 경전 내용이나 교리가 20세기 초반 투르판에서 마니교 경전이 발견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당나라와 티베트, 즉 토번은 660년대부터 730년대까지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지배권을 놓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티베트 제국의 명장 [[가르친링|가르친링 첸드로]][* 가르 가문은 토하라인들과 티베트인 사이의 혼혈 가문이다.]가 이끄는 티베트군이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자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당나라는 [[나당전쟁]]에 파견보낸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티베트군과 맞서야 했다. 당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티베트는 690년대까지 신장 지역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으로 티베트의 동맹이던 튀르기스족이 약화된 틈을 타서, 744년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이 티베트의 돌궐 동맹군을 궤멸시키고 일리 강과 [[이식쿨 호]] 근처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면서 당나라가 서역에서 '''직접 통치'''[* 당나라 치세 초에 동맹이던 돌궐 제국이 [[호라산]] 일대까지 석권한 적도 있었지만, 당나라의 직접 통제가 전혀 미치지 못했다.][* 당나라 치세 초 7세기의 서역 원정군은 사실상 돌궐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고선지가 이끄는 안서 4진 군대는 한족과 소그드인 병사들이 많았다.]하는 영역은 최대 판도로 확장되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페르가나의 왕과 연대하여 750년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다. 오늘날의 타슈켄트에 해당하는 사쉬 왕국의 왕은 평화적으로 물러났지만 고선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보내 사쉬 왕국에서 강간, 살인, 약탈을 자행했고 타슈켄트의 왕을 장안으로 압송시켜 처형당하게 만들자, 사쉬 왕의 아들은 [[아바스 왕조]] 아랍인들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고선지는 아랍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를룩족 기병들을 동원하였으나 이들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배신하면서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는 그 자체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슬림들의 군대는 당나라 군을 격파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토번 제국을 뚫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역시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선지와 [[가서한]]을 비롯한 여러 유능한 장수들이 죽어나가고 안서 4진의 정예병들이 소모되었고, 이 틈을 타서 티베트인들이 안서 사진을 너머 [[돈황]]에 이르는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는 소모된 당나라군을 대신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해준 위구르인들이 차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