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그노 (문단 편집) === 위그노 반란 === 1610년 [[앙리 4세]]가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하고, 메디치 가문(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 하에서 아직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자 위그노의 입장은 약해졌고 차별은 여전했다. 이 때문에 로앙 공작 앙리는 저항 세력을 조직하여 162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국왕군은 위그노 군대의 본거지인 라 로셸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1622년의 몽펠리에 협정으로 일단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몽펠리에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고, 결국 분노한 위그노는 1625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의 지원[* 네덜란드는 종교적으로는 확고한 개신교였으나, 골수 가톨릭이었던 스페인-독일 합스부르크 정권의 격심한 박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합스부르크의 제1 경쟁상대였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도리어 프랑스 개신교도에 대한 탄압을 지원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을 고수해도 외교에 있어서는 상대국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다.]을 받은 프랑스 왕립해군이 라 로셸 근처의 레 섬을 함락하자 1626년에 [[라 로셸]] 시와 루이 13세 간에 파리 협정이 맺어졌다. 라 로셸 시는 종교의 자유를 계속 누릴 수는 있었으나 해군 보유를 금지당했다. 1627년 [[영국]]-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라 로셸의 위그노와 국왕군은 싸움을 시작했다. 직접 포위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리슐리외 추기경이 거대한 방파제를 건설하여 봉쇄한 결과, 영국 함대의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고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린 라 로셸 시는 14개월 만에 항복했다. 3번에 걸친 반란 이후에도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만은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위그노 지방이 가졌던 정치적, 군사적 자치권은 모두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