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그노 (문단 편집) === 계속되는 탄압 === 반란을 진압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외교상의 이유로 낭트 칙령을 존중했다. [[30년 전쟁]] 와중에 [[독일]]의 개신교 국가,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내부가 안정되려면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 온건한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원수]]의 하나였고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같은 사람도 위그노였다.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며 위그노 파는 불안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 Labrousse에 따르면, 1649년 [[찰스 1세]]가 청교도 의회에 참수된 것이 프랑스 위그노들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개신교=왕 살인자 라는 비난에 자기방어를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이 때문에 위그노들은 [[장로회]]를 규탄하고 왕정에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역시 외교상의 이유로 스페인과 대결하면서 영국에게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 위그노들을 옹호해주었고, 1652년 [[프롱드의 난]]에서 위그노는 왕실을 지지[* 프롱드의 난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하였고 왕은 여기에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과이 동맹이 체결되자 왕실은 다시 비타협적인 태도로 돌아서서 양보 정책을 철회했다. 프랑스 개혁교회(Eglise Réformée de France)의 전국 교회회의는 1659년 루단에서 열린 것을 마지막으로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외국인 목사, 특히 [[제네바]]에서 목사 초청이 금지되었다. 1661년에서 1669년 까지 여러 선언과 결정이 위그노파를 압박해갔다. 교회 밖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1663년에는 개신교 장례에 대한 규제가 나타나 일몰 이후 장례식이 금지되고 참석자가 30명으로 제한되었다가 1664년에는 10명까지 억압되었다. 1669년에는 잠시 여러 법령이 무효화 되거나 완화되었으며 장례식 참석 인원 제한도 해제되었다. 교회 조직도 제한되어 토론 집회가 금지되거나, 지역 교회 회의가 왕의 고문으로부터 심의를 받게 되거나, 1663년에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신교도가 높은 직무를 받지 못하게 하거나 직업 제한을 받게 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특히 개신교 장교들 가운데서 많은 숫자가 나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