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다푸 (문단 편집) == 생애 == 저장성 푸양현 만주(滿州)롱[* 롱(弄, lòng)은 [[장강]] 이남에서 골목을 이르는 말이다. 즉 만주롱은 도로명인 셈. 여담으로 만주롱은 현재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다푸(达夫)롱이라 불린다.]의 지식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래도 공부는 어찌어찌 해서 9세에 푸양현 현립 고등 소학교에 들어가 고체시를 지을 능력을 키웠다. 1913년 17세에 형인 위화(郁华)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듬해 7월 도쿄제일고등학교 의학부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1915년 졸업 후 다시 [[나고야대학|나고야 제8고등학교]] 의학부에 들어갔으나 정치학과 강의도 들었으며 1919년에 졸업하고 또 [[도쿄제국대학|도쿄대학]]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이 때 수많은 외국 소설을 접한다. 1921년 같은 중국 출신 유학생인 궈모뤄(郭沫若), 청방우(成仿吾), 장즈핑(张资平), 정보치(郑伯奇) 등과 함께 문예사단 창조사(創造社)를 창단하여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첫 단편소설집 <沈淪(침륜, 간화자로 沉沦)>을 발표했다. 1922년 경제학 학사 학위를 따고 귀국하여 [[상하이]]에 거주하다 [[베이징대학]]에서 통계학 교수로 재직했으나, 1년 후 사퇴한 뒤, 우창(武昌)대학에서 잠시 일하다 중산(中山)대학교에서 문학원에 재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또 그만두고 상하이로 돌아와 창조계간(創造季刊)을 편집하였고 소설론(小說論)과 희극론(戱劇論)을 발표했다. 1928년 태양사(太陽社)에 가입해 [[루쉰]]의 지지 하에서 대중문예(大衆文藝)에 주석을 달았다. 1930년 상하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창단한 발기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 탈퇴했고, 안후이대학 중문학과 교수로 4개월 재직한다. 1933년 [[항저우]]로 이사했고, 이듬해 절강성 정부의 참의로 잠시 일했으며, 또 2년 뒤인 1936년 국민정부 복건성 정부 참의 겸 공보실 주임으로 일했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시]]에서 정치부 설계위원이 됐고, [[푸저우]]와 항저우에 이어 [[싱가포르]]까지 가서 항일 구국 선전을 했다. 하지만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침략하자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마트라 섬]]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그곳까지 쳐들어가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숨어 지냐야 했고, 1945년 8월에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간의 독립전쟁에 시달리다 9월 17일에 일본 패잔병에게 피살당했다. 1952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위다푸를 혁명열사에 추서했고, 1983년 6월 20일에 민정부(民政部)에서 또 혁명열사증서를 수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