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빠 (문단 편집) === 정사 왜곡 === 또한 무개념 위빠들 중 또다른 '''일부'''는 무분별하게 정사드립을 남발하려는 경향도 있는데, 이들의 경우 정사에 대해 어설프게 주워듣거나 그냥 그 존재만 알 뿐, 실제 정사 삼국지를 읽은적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단순히 연의에 맞춰서 촉한정통론을 따르며 유비, 제갈량을 극찬하기보다는 정사 운운하면서 조조를 찬양하고 유비, 제갈량 등을 까는게 더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확인도 거치지 않은채 "그건 연의에서 촉한 띄워주려고." 혹은 "위를 폄하하려고 창작된 거다"를 입에 달고 다닌다. 특히 이들의 자주 보이는 주장은 "정사에서 유비는 무능하고 음흉한 위선자였다",[* 실제로 조조와는 달리 유비는 정사든 연의든 학살한 흔적은 없다.] "반대로 조조는 정정당당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연의가 부풀려서 그렇지 정사에서 제갈량은 그냥 정치 잘하는 문관일 뿐이다." 등이다. 하지만 유비의 위선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는 정사가 아닌 연의 때문에 생긴 것이며[*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했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어버렸다." 고 [[루쉰]]은 평가한다.] 권모술수에서 조조가 한 수 위라는 점은 정사에서의 평가다. 제갈량의 경우, 연의에서 군사적 능력을 요괴에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긴 했지만[* 역시 노신의 평가. 하지만 노신은 알려졌다시피 정치사상에 있어 유가를 몹시 싫어했던 사람이라서, 이것을 마냥 정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러나 정사에서 제갈량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은 어불성설로 오히려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주석을 붙인 배송지 모두 제갈량의 능력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내렸다. 90년도에는 특히 심해서 제갈량은 그냥 정치인일뿐이었고, 군사적 능력은 형편없다고 폄하하고 유비는 그저 무능한 자라고 까내리면서 조조를 위대한 영웅으로 치켜올렸다. 이 때 같이 치켜올린 것이 [[곽가]]. 그리고 자신들은 정사 위주로 안다며 연의나 보면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괴상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는데 2000년도 초까지도 이런 성향이 심했지만, 정작 정사에서 조조의 악행들이 발굴되고, 곽가는 정사로 인해 천재참모의 이미지 자체가 연의로 인한 거품이라는 것이 밝혀져 곽푸치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장 나무위키 역사만 봐도 촉한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만 편향적일 정도의 표현으로, 촉한을 비하 수준으로 까내린 위빠들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문열 삼국지 등이 이러한 경향이 심하다. 삼국전투기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자료만 취사 선택하고 거기에 자기 창작과 뇌피셜을 끼워넣는 식으로 악질적인 왜곡을 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최근에는 이런식의 무개념 위빠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에 대한 안티테제격 촉빠들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 소설가 황석영은 이문열이 조장한 위정통론에 정면으로 맞서 삼국지연의의 원전 주제의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삼국지를 번역해냈다. 황석영의 촉한정통론은 기존의 유교적 관념 외에도 그 시대를 겪고 기억하는 민중의 관점으로 삼국지연의를 조망하여 10대 3의 실재와 허구에서, 역사와 다른 3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식의 반영이라고 표명했다. 즉, 나관중이나 후대의 모종강 모두 민중들의 사관을 받아들여 삼국지연의를 쓴 것이지, 그들만의 작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원래부터 부당한 권력자들에 대한 항거,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민초들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려던 염원이 담긴 책이었다. 특히나 재상의 활약이 돋보이는게 촉나라의 특징인데 이 재상에 있던 제갈량이 정치만 잘 하는 인간이었다면 제갈량 생전의 그 여러번의 북벌들은 뭐란 말인가? "그건 나라를 짜내서 한 수준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도 촉나라는 몇번이고 북벌을 해도 자국의 역량이 바닥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위나라의 침공인 [[흥세 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이게 제갈량 사후 10여년 뒤의 일이긴 하나 그 사이에도 촉나라는 꾸준히 북벌을 시도했음을 생각해보면 제갈량은 촉나라의 현실에 어느정도 맞게 북벌을 했고 그 북벌의 규모나 수준이 그정도라는 것을 보면 촉나라의 역량도 그래도 제법 되었고 그 역량을 끌어낸 제갈량의 능력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당장에 촉한 이후에 파촉지역에 등장한 왕조들은 하나같이 촉한처럼 큰 역량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마치 민중을 짜내서 무리한 전쟁을 하는, 마치 북한같은 악덕 정치가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제갈량의 북벌이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벌 실패가 '나라의 병력과 자원을 끌고 나가 말아먹고 온 것'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제갈량은 무인이라기보단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총력전(보통 [[회전]]이라고 부리는 것)을 벌이기보다는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실익이 없을 것 같으면 포기하는 식의 북벌을 행한다. 실제로 2차 북벌 당시 진창성 함락이 좌절되자 곧바로 철수하고 빠르게 북벌을 정리한다. 추가로 북벌의 목적인 '조위 토벌'은 달성하지 못할 지언정 음평이나 무도 등 요충지를 점령해 조위를 압박하는 등 일부 성과를 보기도 했다. 제갈량은 유비에 대한 충성과 한 황실 부흥을 시도한 명분 면에서만 높이 평가받는게 아니라, 한정된 자원과 국력을 지닌 소국인 촉한을 안정적이고 부강하게 이끈 현실 정치인으로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나라를 무리하게 짜내서 택도 없는 전쟁을 하던 이상에 미친 전쟁광이 아니었다. 실제 북벌과정을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명확해지는데, 일단 227년 시작된 1차북벌인 [[가정 전투]] 당시 잘 나가던 촉군이 마속의 뻘짓으로 참패하고 실패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2차 북벌을 보면 상황이 좀 다른데, 228년 11월에 후출사표를 올리고 12월에 신관을 통과, 진창을 20일간 공격하다가 조위의 구원군이 오자 바로 퇴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달인 229년 1월에 3차 북벌이 이뤄지며, 위에 언급된 무도, 음평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둔다. 즉 2차 북벌은 아무리봐도 국지전에 불과하며 별다른 피해도 없었고, 여기까지 보면 1차 북벌은 실패, 3차 북벌은 성과가 있었다. 231년에 일어난 4차 북벌인 [[노성 전투]]의 경우 사마의와 제갈량이 서로 오래간 대치했으나, 큰 규모의 교전은 없었고 오히려 교전했을때 제갈량이 위군을 대파하고 전리품을 챙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장마로 인해 병량 수송이 곤란해지는 것을 곤란해한 촉군은 퇴각하며, 사마의가 장합에게 무리한 추격을 명령했다가 장합이 전사한다. 보다시피 여기에서도 큰 피해나 패배는 없었다. 이듬해인 232년부터 234년까지 제갈량은 농업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조련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북벌을 준비한다. 충분한 준비를 끝낸 끝에 단행한 것이 바로 [[오장원 전투]]이며, 이때도 위군으로 인해 촉군의 기동이 막히자 둔전을 실시하고 백성들과 함께 평화롭게 생활하며 식량을 생산했다. 백일간 대치하던 도중 제갈량이 과로와 병으로 쓰러져 죽고나서 촉군이 퇴각한 것이다.[* 이를 두고 위서에서는 촉군의 군량이 다하고 형세가 불리해져 도망가던 중 제갈량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적었지만, 위에 언급했다시피 당시 기록을 보면 형세가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대치중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배송지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어쨌거나 위서를 포함한 어떤 사서에서도 촉군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은 없다. 제갈량 본전에 따르면 사마의는 촉군이 남기고 간 영루와 처소를 방문했으며, 촉군 진영에서 도서와 양곡을 많이 노획했다고 하니 퇴각하면서 물자를 많이 포기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은 촉군에 버리고 갈만한 물자가 많이 있었다는 뜻이니, 군량이 떨어져 불리했다는 위서의 서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위 과정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제갈량의 북벌 중 패배하고 퇴각했으며, 큰 피해를 입은 것은 1차 북벌 뿐이다. 그 외 북벌은 전부 대치가 길어지거나 성과를 거두고 나면 퇴각한 것 뿐이며, 사실 '북벌'이란 이름이 붙었기에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이지 국지전 측면에서 보면 그 과정에서 촉한의 영향력이 조금씩 넓어졌기에 (1차를 제외하면) 실패라고 잘라 말하기도 힘들다. 물론 전쟁 자체가 물자를 많이 소모하는 행위이지만, 제갈량은 4차북벌 당시 보리를 수확하거나 5차 북벌 당시 둔전으로 자체 식량 생산을 하면서 버티곤 했고, 2차 북벌 당시처럼 본국에서 가져온 병량으로만 버틸 때는 단기전(20일)만 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3차 북벌처럼 장기 원정을 간 이후엔 3년에 가까운 휴식기를 통해 국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개 시설과 기반 시설을 보수, 신축하는 과정을 거쳤다. 북벌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북벌이 무리했다거나, 나라를 쥐어짜고 국력을 소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간동안 나라의 경제를 정비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애초에 제갈량이 죽은 후 백성들이 그를 위한 제사를 '''자발적으로''' 지냈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제사가 빈번하게 이뤄지자 촉한 조정의 신하 무리들이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사당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선이 263년에 이에 동의하면서 첫 무후사가 만들어진다. 촉서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자 도처에서 사당 세울 것을 청했으나 조정이 거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자 신하들이 다시 표를 올렸다고 한다.][* 촉까들은 종종 삼국지연의가 촉한 측의 인물들을 미화했고, 이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정반대이다'''. 촉한의 인물들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높았기에 당대부터 위에 언급된 제갈량에 대한 제사처럼 이들이 추앙받았고,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공연들로 통해서 고착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이 후대의 삼국지평화, 연의 등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