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스키 (문단 편집) === 한국에서 === [[파일:국산 위스키 역사.jpg|width=800]] 한반도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다른 서구 문물과 함께 '유사길(惟斯吉)'이란 이름으로 들어왔는데, 이후 통상장정의 경정을 거치며 당시 수준으로 높은 관세율을 부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화이트 호스' 등 스카치 위스키 등이 수입되었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사회적 특성상 자연히 일제시대 때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는데, 당시 1900년대 초 풍한발효라는 양조사에서 위스키 제조를 시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기술이전이나 해외 답사가 전혀 없이 시도해 결국 실패했다. 위스키 제조가 어렵다는 것이 양조업계에 알려지자 이후 양조업계에서는 진짜 위스키가 아니라 소주에다가 색소와 향료를 섞어 위스키를 흉내낸 유사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5년 광복 직후를 지배했던 고래표위스키와 뉴스타위스키다. 그러나 이런 가짜 위스키들에는 소주에다가 향을 입히는 과정에서 독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다.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본격적으로 수출입을 시작하며 [[산토리]]의 토리스 위스키(トリスウイスキー)[* 일본에서도 전후 늘어난 빈곤층이 주 소비층이었던, 위스키 원액에 주정과 색소를 더해 만든 저가 위스키이다. 현재도 생산중이지만 싸구려 칵테일이나 노년층의 추억팔이 용으로만 소비된다.]가 들어오는데, 당시 반일감정이 엄청났던 만큼 토리스 위스키는 곧바로 판매 금지 및 압류 전철을 밟게 된다. 그러나 이 토리스의 영향을 받아 국내의 양조업계들은 이걸 씹고 뜯고 맛보고 분석해, 위험성이 거의 없는 개선된 가짜 양주의 제작에 성공한다. 그것이 바로 [[도라지 위스키]]로, 1960년대까지 양주의 수요 및 공급을 지배했다. 도라지 위스키는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위스키 모양을 한 희석식 소주에 가까운 물건이었는데도 어찌됐건 위스키라는 이름을 달고 팔리는 만큼 당대 젊은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도라지 위스키의 노하우도 퍼져 백양위스키, 쌍마위스키, 리라위스키 등 여러 모방 위스키도 절찬리에 판매된다. 1971년에서야 진짜 위스키 원액을 넣은 구색이라도 맞춘 기타재제주가 나오는데 청양산업이 군납 목적으로 만든 그렌알바가 그것이다. 그렌알바는 위스키 10~20%에다가 국산 소주 주정을 섞어서 제조한 최초의 위스키 원액을 넣은 양주였다. ||[[파일:JRㅇㅇㅇㅇㅇ.jpg|width=100%]]|| ||[[파일:죠지드레이크.jpg|width=100%]]|| ||[[파일:죠지드레이크1.jpeg.jpg|width=100%]]|| 1974년, 백화양조[* 1945년에 조선양조로 설립되어 1951년 대한양조, 1967년에 백화양조로 개명.]와 진로가 이에 자극받아 외국의 위스키 원액을 수입하는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해 각각 [[죠지 드레이크]]와 JR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희석 양주만이 나오던 한국에서 원액을 희석한 이른바 기타재제류가 아닌, 원액 100%로의 진짜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984년이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높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원액을 조금만 섞어서 파는 질 낮은 주류 시장을 굉장히 아니꼽게 보고 있었는데, 결국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광고한 것을 꼬투리잡혀 6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징벌당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국민들의 고급 주류에 대한 수요를 터 줘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던 정부는 1976년에 국내 거대 양조회사들[* 백화양조, 진로, 오비씨그램, 롯데칠성음료, 해태산업.]에 위스키 제조 면허를 발급한다. ||[[파일:베리나인.jpg|width=100%]]|| ||[[파일:길길길길길.jpg|width=100%]]|| ||[[파일:드슈드슈.jpg|width=100%]]|| 이를 통해 나타난 것이 1970년대 후반에 나타난 25% 위스키 비율을 가진 백화주조의 베리나인, 진로의 길벗, 해태주조의 드슈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국산 위스키들이 대박을 터뜨리며 고무된 [[군부 정권]]은 국산주류 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해 30% 위스키의 생산 특명을 내린다. 당시 최대 양조사였던 오비씨그램, 진로위스키, 베리나인은 원주 30%의 엿기름을 원료로 한 국내산 몰트 위스키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렇게 등장한 것이 베리나인 골드, 길벗 로얄, 블랙스톤으로 최초로 등장한 프리미엄 2차 라인업이다. 1980년대 당시 백화양조의 베리나인 골드가 15만1백31병(52.8%),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이 7만4천1백78병(26.1%), 길벗 로얄이 6만79병(21.1%)[* 출처 조선일보]으로 1강 2중의 체제가 구축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국내산 양주들은 원액을 상당 부분 외국에 의존한다는 약점을 벗지 못했고, 이에 정부는 [[외화]]절약과 [[국위 선양]]을 목표로 해 국산 위스키 개발 계획을 수립한다. 정부는 몰트 위스키의 원액 제조시설을 1983년까지 완비하고 그레인 위스키의 원액 제조를 국내산 곡물로 하는 방법을 1984년까지 개발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과 목표를 배경으로 한 채 1983년 11월, 백화양조는 군산, 진로는 이천에 원액 생산 공장을 건설하여 100% 국내산 제조 위스키의 포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위스키의 향입 숙성은 최소 3년을 필요로 했기에 양조자들은 공장에 들어가는 자금을 위해 고급 라인업인 새로운 술들을 출시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시장에서 그리 호평받지 못했다. ||[[파일:베리나인골드킹.jpg|width=100%]]|| ||[[파일:VIP위스키.jpg|width=100%]]|| ||[[파일:패스포트위스키.jpg|width=100%]]|| 1984년 백화양조에서는 베리나인 골드 킹, 진로는 VIP, 오비씨그램에서는 패스포트가 출시되는데 스카치 위스키라는 새로운 메타를 주도한 패스포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 다를 것 없이 비싸기만 하다는 평을 받으며 몰락했다. 거대 양조장들의 몰락과 인수합병을 통한 급변을 뒤로 하고 1987년 3월, 최초의 국산 위스키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로의 다크호스와 오비씨그램의 디프로매트인데 안타깝게도 지나친 고가 제품이 되어버린 탓에 소비자들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파일:위스키몰락.jpg|width=100%]]|| 이렇게 칼을 갈고 준비한 국산 위스키가 불안하게 해외 위스키의 수입을 마주한 결말은 파국이었다. 너무나도 퀄리티가 높은 스코틀랜드산 위스키에 국산 위스키는 전혀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전 세계적으로 위스키 원액 생산의 대부분은 스코틀랜드가 차지하며 그나마 자국산을 만드는 곳은 미국과 일본 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높은 목표를 세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91년, 위의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끝에 모든 국내 양조장은 위스키의 생산을 포기하게 되며 국내의 위스키 제조는 수입만을 사용하게 된다. 2020년대 초부터는 주로 중년층 이상에서 유행하던 위스키가 [[코로나 19]] 유행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혼술]] 문화가 발달하고 대형 마트나 주류 전문점에서 주로 판매되던 위스키가 [[편의점]] 등 다양한 곳으로 판매처가 넓어지면서 2~30대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유명 제품의 경우 매장에 입고되자마자 [[오픈런]] 손님들에 의해 매진되는 현상도 보인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3/nwdesk/article/6465513_36199.html|관련 기사]] 2023년 후반부터는 인기가 슬슬 내려가는 중이다. 오픈런은 여전하지만 인기는 상당히 내려가서 하이볼 위주의 중저가의 판매량은 늘었으나 이전 처럼 10만원대 이상의 중고가 위스키의 구매는 매니아 층을 제외하고는 많이 줄어든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