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승 (문단 편집) === 격앙된 비가 === 융흥 원년(1163년), 조정에서는 위전을 보내 해주(海州)를 지키게 했고, 가화중의 부대를 해주로 이동시켰다. 가화중은 해주에 도착하여 위승의 부하들을 매수하려는 음모를 먼저 감행하여 위승과 부하들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 하였다. 위승은 이 사실을 알고 가와 시비를 가렸으나, 오히려 가화중으로부터 위승의 전횡을 도독부에 고발당하고 위승의 독단을 무마하지 않아 결국 산동로 충의군 도통제 등의 벼슬을 얻어 강군을 주둔시켰다. 가화중이 위승을 모함한 것이 들통난 후에야 복직하여 해주로 돌아가 머물게 되었다.이듬해 주화파가 득세해 해주가 다시 금나라로 편입되자 위승은 초주지주로 옮겨 청하구(지금의 회음시 청포구)의 군무를 전담하고 회동로 달래기사 유보의 절제를 받았다. 유보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재주를 기현하고 질투하는 놈으로, 초주에 가서 위승에게 소량의 군대만 몰아주고 전차를 거두어들였다. 금 병사에 대해서는 주화파의 뜻을 받들어 참고 양보만 했다. 금나라의 병사는 탈 만한 기회를 보이자 사주로 가서 배로 양식을 운반하겠다고 속여 청하구에서 회로 들어왔다. 위승은 이것이 남침의 음모임을 알고 유보에게 보고했으나 유보에 의해 기각당하고 금나라 병사는 기회를 틈타 기병을 보내 위승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위승은 본부 인마와 김병을 이끌고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승부를 기록했다.이때 또 많은 군대가 도착했다. 위승은 필사적으로 반격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유보에게 급한 일을 알린다. 유보는 "송금강이 화해를 하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굴하게 말했다. 40리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유보는 병졸을 한 명도 보내지 않다. 위승의 부대는 화살을 다 썼지만, 여전히 토강을 진지로 삼아 적들과 힘들게 싸우고 있다.그는 유보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송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에서 전사할 줄 알았다. 당신들이 살아난다면 왕에게 보고하고 싶다. 이어 보병에게 먼저 철수하고 자신은 기병을 데리고 후방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기마병과 철수를 하며 싸웠는데 초주에서 불과 9km 떨어진 곳까지 물러갔을 때 이미 기진맥진했고, 더 이상 적진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서지 못해 위승을 비롯한 명장들이 죽었고 이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위승이 죽자 유보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효종은 유보의 가산을 몰수하고 경주로 좌천시켰다. 위승은 보령군절도사(保寧軍節度使)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아 진강부 강구진(江口鎭)에 '포충(包忠)'을 세웠으며, 그가 전사한 자리에 '포충사(砲忠祠)'를 세웠다.두 아들을 각별히 배려해 장남 위교에 무공대부(武功大夫), 충주자사(忠州刺史), 차남 위창(魏昌)을 승신랑(承信郞)으로 봉했다. 순희 15년(1188년) 송효종은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인재는 써봐야 능하다. 만약 변방이 없었다면 위승 같은 인재를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조서를 내려 위 교외에 임명된 데 이어 양절서로의 마보군 부총관으로 추증되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20년 출생]][[분류:116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