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안석 (문단 편집) == 생애 == 경조(京兆) 만년현(萬年縣) 출신으로 위완(韋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안석의 집안은 경조 위씨 운국공파로 [[위숙유]]의 증손이고, 위진의 손자이다. 위안석은 명경과에 급제하여 건봉현위(乾封縣尉)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소양사(蘇良嗣)의 예우를 받았다.[* 소양사는 이후 재상이 될 때 위안석의 재능에 대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크게 써야하거늘, 어찌 주현에서 헛수고를 하는가”라고 이야기하며 위안석을 측천무후에게 천거하였다.] 이후 위안석은 옹주(雍州) 사병참군(司兵參軍), 선부원외랑(膳部員外郞), 영창현령(永昌縣令), 병주 사마, 병주 자사, 덕주(德州) 자사, 정주(鄭州) 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위안석은 정중한 성품으로 담소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이나 관리들로부터 경탄을 받았다. 이후 700년에는 문창우승(文昌右丞)[* [[측천무후]] 시기 상서우승의 관명.]이 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였고 난대시랑(鸞臺侍郞),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로 임명되었으며,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임하였다. 703년에는 신도 유수가 되었고 천관상서[* [[측천무후]] 시기 이부상서의 관명.]와 추관상서[* [[측천무후]] 시기 형부상서의 관명.]를 겸임하였으며, 최신경(崔神慶) 등과 함께 태자 이현의 시독(侍讀)이 되었다. 704년에는 납언과 문창좌승의 직무를 맡고 태자좌서자, 봉각난대삼품(鳳閣鸞臺三品)을 겸임하였다. 당시 측천무후의 측근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측천무후로부터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자, 위안석은 이들을 욕보이고 이들의 죄상을 나열하였다. 측천무후는 위안석과 [[당휴경]]에게 장역지, 장창종 형제에 대한 추국을 명하였지만 얼마 안 있어 추국은 흐지부지되고 위안석은 양주(揚州) 대도독부 장사로 좌천되었다. 705년, [[환언범]], [[장간지]], [[원서기]], [[경휘]], [[최현위]] 등이 [[신룡정변|궁중 쿠데타]]를 일으키고 측천무후의 태자 이현을 복위시켰다. 신룡정변이 일어난 뒤 위안석은 형부상서로 임명되었다가 이부상서로 임명되었다. 또한 5월에는 장간지를 대신하여 중서령이 되었으며, 상왕부 장사를 겸임하고 운국공(鄖國公)으로 책봉되었다. 뒤이어 위안석은 호부상서로 전임되고 이후 시중, 감수국사를 역임했다. 710년 중종이 승하한다. 중종이 승하한 뒤 [[위황후]]와 [[종초객]], 기처눌 등은 중종의 유조에서 상왕 이단이 정치를 보좌하라는 문구를 삭제하였는데 [[소괴]]가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위안석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도 않는다. 이때의 위안석의 대응은 곧 자신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상왕 이단의 아들인 임치왕 이융기가 [[당륭정변|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주륙하고 상왕 이단이 즉위한다. [[예종(당)|예종]] 즉위 후, 위안석은 태자소보로 임명되고 순국공(郇國公)으로 책봉되었다. 이윽고 위안석은 다시 상서우복야, 시중, 중서령을 역임하였고 711년에는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다. 당시 [[태평공주]]가 [[소지충]], 두회정 등과 함께 몰래 이융기를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태평공주는 위안석의 사위인 당준(唐晙)을 시켜 위안석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위안석은 오히려 태평공주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후 예종은 위안석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동궁을 살펴달라고 했는데, 위안석은 이것이 태평공주의 계략이라고 설명하며 태평공주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간언을 올렸다. 태평공주는 몰래 이 말을 듣고 위안석에게 분노하여 그를 참소하여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곽원진이 미리 위안석을 보호하여 위안석은 목숨을 건진다. 위안석은 뒤에 상서좌복야,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되고 태자빈객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실권을 빼앗긴다. 곧이어 위안석은 재상에서 파면되었고 특진으로 임명되었으며 동도 유수를 맡았다. 위안석이 동도 유수를 맡을 즈음에 태상주부 이원징(李元澄)에게 시집을 갔던 위안석의 딸이 죽었는데, 위안석의 아내 설씨는 이원징이 총애를 주었던 여종이 위안석의 딸을 저주하여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종을 붙잡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드러나자, 위안석은 어사중승 양무겸(楊茂謙)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포주(蒲州) 자사로 좌천되었고, 얼마 안 있어 청주(靑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위안석은 포주 자사로 옮긴 뒤에 태상경(太常卿) 강교(姜皎)[* [[강모(당나라)|강모]]의 증손이자 [[강행본]]의 손자이다.]의 청탁을 거절하였는데, 714년 강교의 아우인 강회(姜晦)가 어사중승이 되고 어사 곽진을 시켜 중종이 승하할 때 위안석의 상술한 행동을 명분으로 위안석을 다시 탄핵하였다.[* 물론 위안석 본인은 이 당시에 어사 홍자여(洪子輿)를 시켜 종초객과 기처눌의 죄상에 대해 탄핵하려고 하였지만, 홍자여가 사면령이 이미 내려왔다고 주장하여 종초객 등에 대한 탄핵은 불발로 돌아갔다.] 청주 자사로 있었던 위안석은 다시 강회의 탄핵을 받고 면주(沔州) 별가로 좌천되었는데, 면주에 이르러 강회는 다시 위안석이 정릉을 축조할 때 관청의 물건을 탐하여 숨겼다고 탄핵하였다. 위안석은 강회의 두 차례의 탄핵에 분개하여 결국 병으로 죽었다. 위안석은 사후 포주 자사로 추증되었다가 천보 연간에 다시 상서좌복야, 개부의동삼사, 순국공으로 추증되었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