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안스카이 (문단 편집) ==== 홍헌제제, 황제 즉위 ==== [[파일:external/g.udn.com.tw/f_4160362_1.jpg]]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야심의 일환으로 위안스카이는 사천도독 윤창형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14년 12월 20일, 정식으로 공자를 숭상하기 위한 사천전례를 부활하고 12월 23일에 거대한 규모의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으로, 왼쪽에서 두번째 수염 하얀 노인이 위안스카이다. 전부 왕처럼 보이겠지만 위안스카이 혼자만 [[흉배]]를 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분이 된다. [[면류관]]의 평천판에는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해괴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주나라]]식 의복도 아니고 [[단령]]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곤룡포]]에 들어가는 흉배와 어깨 장식이 아니라 12가지 문양이 수놓아져야 한다. 나름 [[주나라]] 시대의 복식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사실이다. 1644년부터 청나라의 중국 정복이 실시됨에 따라 한족 중심의 화이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복과 문화 그리고 사상을 크게 탄압해 한족 왕조의 문화가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 영향으로 [[박규수]]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와룡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다른 신하의 집을 방문했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주공단|주공]]의 법복이라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있고, 처음에는 거부감이 심했던 [[변발]] 역시 수백년간 강제되면서 [[상투]]가 잊혀지고 [[뇌이징|점점 보다보니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 개항 이후 서양식 단발이 들어오자 변발이 전통문화라고 반발하는 여론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도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남자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세번째 배신-- 당시 어용 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