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안스카이 (문단 편집) === [[21개조 요구]]에 서명, 매국 === 이에 더해서,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내용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산둥성]] [[칭다오]]의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간다. 당시 독일은 이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맥주는 유명하다. 그리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 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 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 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 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것은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위안스카이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협상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