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안스카이 (문단 편집) ==== 군벌의 위협 ====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 혁명당'(오늘날의 [[중국 국민당]]의 전신)을 조직하여 해외에서 '반(反) 위안스카이 독재' 운동에 헌신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Yuan_shikai_re-design.jpg]] 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가 위안스카이에게 24시간 내로 제재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왔지만 전국의 군벌들이 입을 모아 제재를 칭송하던 와중에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갑자기 거기서 왜 나오냐는 반응이라서 무시하였고 결국 12월 25일 전계군벌과 량치차오가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관전하다가 대거 합세했다. 호국군은 초기에 조금 주춤했으나 북양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각성이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옌시산]], [[장쭤린]] 등 즉위를 부추기던 쫄따구들은 입을 쓱 씻거나 심지어는 아예 단절 및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했고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의 측근들까지도 퇴위를 종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숙정은 위안커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위안커원도 자신이 얼마 전에 위안스카이가 읽는 순천시보와 시중의 순천시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숙정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한 사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