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위안스카이 (문단 편집) === [[조선]]에서의 감국(총독) === 위안스카이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오만했으나, 당시에는 벼슬을 하고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를 엄히 단속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시행했다. 결국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의 참모인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의 경력은 [[조선]]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창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이때 위안스카이는 우창칭의 휘하로 참전했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수괴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압송하여 [[톈진]]에 연금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갑신정변]] 진압에서 맹활약하는 등 사실상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역할로서 조선 [[총독]](감국대신)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식민지|식민지배]]의 일종인 [[보호국]]으로 전락했으며,[* [[거문도]] 점령 전후로 영국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일본도 이를 묵인하는 등 열강들도 조선과 우호 조약 체결과 별개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봉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8370|#]]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2208100048|#]]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1/07/31/QZ7RUUQMZZGV7KUFZMGRWOGLAE/|#]]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는 해관 통합, 차관 전담,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요하고,[* 1892년에 조선 조정이 주조한 신화폐의 '대조선'이라는 호칭에까지 시비를 걸어 '대(大)' 자를 없앨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대조선'이 새겨진 화폐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그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주조 가능해졌다. [[https://www.bok.or.kr/portal/singl/crrncySearch/view.do?crrncySn=6528&menuNo=200127&listType=G&pageIndex=398|#]] ] 정치적으로는 1886년에 조러밀약을 계기로 고종폐위와 [[이준용]]의 추대 및 대원군 섭정을 통해 조선을 합병할 것을 건의하거나, 고종을 정치적으로 위협했다. 청일전쟁 패전 후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가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