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열왕 (문단 편집) === 삼진 분립과 전국 시대의 시작 ===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 [[진(춘추오패)|진(晉)나라]]의 대부들인 [[위문후|위사]](魏斯), [[한경후|한건]](韓虔), [[조열후|조적]](趙籍)이 위열왕에게 자신들을 제후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원칙대로라면 이들을 물리치고, 진나라를 중흥시켜 주는 것이 바로 봉건 제도의 질서 체계였으나[* 그래서 [[환왕]]이 진후를 들어내려는 곡옥을 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주나라는 이미 실질적인 군사력은 약체였고, 말만 천자지 [[애왕(주)|애왕]], [[사왕]], [[고왕(주)|고왕]]이 왕위를 갈아치우는 사건이 일어나 권위가 바닥을 기었다. 그러니 진나라를 부흥시킬 여건이 되지 못했고, 그들을 제후로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사는 위나라, 한건은 한나라, 조적은 조나라를 세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이때부터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의 대부분의 땅은 삼진이 가져가고, 진(晉)나라는 [[곡옥#s-2]](曲沃)과 [[강(동음이의어)#s-4.3|강]](絳)만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위나라의 위사 즉, [[위문후]]는 이리(李悝)를 등용하여 그 계책에 따라 전국시대에 최초로 부국강병을 이룩해 최강국의 자리에 올랐다. 조나라의 조적 즉, [[조열후]]는 공손련을 등용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기고 강성해졌다. 위열왕 24년(기원전 402년), 위열왕이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인 희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안왕(주)|안왕]]이다. [[분류:주 국왕]][[분류:기원전 402년 사망]][[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