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유런 (문단 편집) === 말년 === 1946년 10월 제헌국민대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년 4월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면서 감찰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에 실시된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후스]], [[우징헝]], [[왕윈우]]와 함께 장제스를 총통 후보로 추천했으며 자신은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자신의 장점만을 선전하는 신사적인 유세를 하였다. 4월 16일, 512인의 추천으로 부총통 후보로 등록되었으며 4월 23일 오전에 있었던 1차 투표에서 493표를 얻어 4위를 기록함으로 낙마했다. 이후에도 1947년 <남중국과 태평해. 지리적 명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해 명칭은 이 바다가 오직 일본하고만 접해 있다는 대단히 그릇된 인상을 준다. 이 부적절한 명칭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 바다를 일본의 내해로 만들려는 일본의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세계평화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일본해라는 명칭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가의 출판물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맞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해 개칭 운동을 벌였다. 1949년 6월 11일에 설치된 중국 국민당 비상위원회에서 비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부천대]]가 단행된 후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대만에서 죽을 때까지 감찰원장을 맡았다. 1950년, [[쩌우루]], [[쥐정]]과 함께 [[천리푸]]의 부탁을 받고 국민당 개조를 장제스에게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대륙에서부터 말을 안 들었던 천리푸를 숙청해버리는 것으로 답했다. 이후 국민정부 평의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2년에 개최된 국민당 7전대회에서 중앙평의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고향인 [[섬서성]]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1964년 폐렴으로 인하여 타이베이 영민총의원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66년 그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 [[위산(대만)|위산]]에 설립되었으나 1996년 [[타이완 독립운동|대만 독립주의자]]들의 반달리즘으로 파괴되어 계곡으로 던져지는 수모를 당했다. 2014년, 서거 50주기를 맞아 [[대만 부총통|부총통]] [[우둔이]]가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