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정척사파 (문단 편집) === 한주학파 === 한주 이진상의 학설[* 이진상도 기정진처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55|주리설]]을 따랐지만, 동시에 [[연역법]]인 순추(順推)와 [[귀납법]]인 역추(逆推)라는 당시로서 독특한 논리로 논증했다. 인식론에 있어서도 감각적 인식인 도간(倒看)·경험적 인식인 횡간(橫看)·논리적 인식인 수간(竪看)이라는 3단계 인식법을 제시했다.]을 토대로 한 학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908|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116|이진상]]과 그의 문인 중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리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700|곽종석]],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7352&localCode=krcn|이승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543|장석영]], [[http://www.grandculture.net/goryeong/toc/GC02900983|이두훈]], [[http://www.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846|윤주하]], 김진호,[* 여러 웹사이트에 김진우(金鎭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김진호(金鎭祜)가 옳다. 자는 물천(勿川)이며, 아들 대순(大洵)이 간행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873|『물천문집』]]도 전해진다.] 허유, 이정모가 있으며, 곽종석 문하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26|이인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418|이병헌]], 김창승이 대표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웬만한 다른 학파들보다 서구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곽종석은 균형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선 유학(儒學)뿐만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한 1890년대 중반부터는 국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89|만국공법(萬國公法)]], 즉 국제법에 주목했다. 한주학파 내에서 가장 '위정척사파'라는 대중의 인식에 부합할 이승희[*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복구하고자 노력했고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리기도 했다.]도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동시에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고,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곽종석의 문인에 이르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인재(李寅梓)는 지방의 선비들이 폭넓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12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정리한 논문인 「철학고변(哲學攷辨)」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된다. 김창숙(金昌淑)은 곽종석의 문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었는데,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회의 총무로 활동하였고, 선조 김우옹(金宇顒)을 배향한 [[http://www.grandculture.net/seongju/toc/GC08400434|청천서원]]을 수리해 신식학교인 [[http://www.grandculture.net/seongju/toc/GC08400329|성명학교]][* ‘신교육을 통한 신진 인재 양성’이 목표였다.]를 세웠다. 한주학파의 시대 대응방식도 여타 보수유림과 다른 점이 많았다. 보수유림의 순절투쟁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보다 만국공법을 활용한 구미열강과의 공조체제를 통해 국권을 수호·회복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접근방식은 자칫 이들이 몸담고 있는 유림사회로부터 ‘오랑캐(夷狄)’에 가까워진다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때문에 일제를 규탄하고 국제법에 따라 처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외국공사관에 전달한 것 또한 다른 어떤 학파가 아닌, 역설적이게도 한주학파의 곽종석·윤주하·이승희·이두훈이었다. 이러한 학맥 탓에 흔히 위정척사파라 불리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와 한 그룹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해서는 전술했듯 국제법에 바탕하여 구미열강 협조를 이끌어 내려했고, 이는 1919년 [[파리 장서 사건|파리장서운동]]으로 나타났다. 위의 김창숙처럼 서원을 현대식 학교로 바꿔세운 인물이나 [[http://www.grandculture.net/goryeong/toc/GC02900986|이태환]]처럼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한 경우도 있고, 이두훈의 경우 독립을 위해서는 유교적 순수성을 고수하지 말고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서 벗어나야 하며 서구의 신교육과 신학문 등 신사조의 적극 수용해야 함을 주장했고, 여기에 바탕을 둔 [[http://www.grandculture.net/goryeong/toc/GC02900718|동화세기]] 등 남긴 저술이 있으므로 한주학파 전체를 위정척사파라 뭉그러뜨리기도 불가능하다. 즉 한주학파에게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종래 유학을 따르고 서구 학문과 구미와의 통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내정 간섭을 배척하는 것'이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