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진남북조시대 (문단 편집) === 빛나는 암흑시대 === 4백 년 가까이 중국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나뉜 위진남북조시대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전쟁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서 끊이지 않았고, 후한 시기부터 불황에 빠진 경기는 바닥을 찍었다. 백성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었으며, 높으신 분들은 이 와중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오호]]에게 중원을 빼앗기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오랫동안 그곳을 터전으로 삼던 한족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장강 이남으로 밀려난 한족은 그동안 깔보던 이민족에게 '도이(島夷)', 즉 '섬 오랑캐'라고 불리는 굴욕에 시달리게 됐다. 한결같을 듯하던 '화이(華夷)' 질서는 뒤집혔고, 세계 문명의 중심임을 자처하던 '중화(中華)'의 자부심은 빛을 잃었다. 이때 하루아침에 세워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망하여 없어진 왕조가 너무 많아서 그 이름들조차 외우기 어렵다. 강북에서 [[전조]]는 [[후조]]에 졌고, 후조는 [[염위]]에 넘어갔으며, 염위는 [[전연]]에 무너졌다. 또한, 전연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 전진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 후진은 [[동진]]의 장수 유유([[무제(유송)|송 무제]])에게 패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강남에서 벌어진 상황도 강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정북벌로 영웅이 된 유유는 [[사마씨]]의 동진을 집어삼켜 황제 자리에 올라 송(宋)을 세우지만, 그의 못난 후손들은 나중에 [[소도성]](제 고제)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하지만 소씨의 도 얼마 못 가서 일족인 소연([[양무제]])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양은 남북조에서 보기 드물게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지켰으나,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쇠퇴하였다. '삼국(三國)'이니 '십육국(十六國)'이니 '육조(六朝)'니 하는 숫자 섞인 명사 속에는 그러한 흥망사가 얼핏 새겨졌다. 일본의 동양사학자이자 '중국사의 대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국중세사』에서 위진 남북조 시대를 아우르는 중국 중세를 가리켜 '큰 골짜기의 시대'라고 부른 게 마땅하다고 여길 만치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를 암흑기로만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도연명]]이 지은 시, [[왕희지]]가 쓴 글씨, [[고개지]]가 그린 그림은 당시 문화와 예술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한문 문체인 변려문이 성행한 것도 이 무렵에 생긴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된 때도 위진남북조시대였다.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지표로 꼽히는 한자 문화, 유교, 율령제, 불교 등이 이 시대에 접어들어서 중국 밖으로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소수림왕이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서 개혁을 이루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한편 고구려와 경쟁 관계에 있던 [[백제]]와 [[신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중국 왕조들과 교섭하거나 교류하면서 번영을 꾀했다. 이처럼 중국이 매우 혼란스러웠음에도 문명은 더욱 발달하여 중국을 둘러싼 여러 국가와 종족에 영향을 역설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카와카츠 요시오는 이를 두고 '빛나는 암흑시대'라는 말로 위진남북조시대의 역설을 표현했다. '큰 골짜기의 시대'가 위진남북조시대의 그림자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면, '빛나는 암흑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보이는 용어다. 카와카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974년에 쓴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에서 "중국의 고대문명은 어떻게 이 기나긴 난세에도 불구하고, 단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풍요롭게 보다 넓은 범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귀족제 사회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전란이 계속된 [[육조시대]]에 무력을 가진 무장의 활약은 대단히 눈부셨다. 특히 화북에 침입한 북방 이민족은 그 뛰어난 무력을 배경으로 한민족을 제압했다. 이처럼 무인의 역할을 컸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이들 무인이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봉건적인 무인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전란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대체로 지켜졌다. 육조에서부터 수·당시대에 걸친 사회는 보통 귀족제 사회라고 규정되는데, 여기에서의 귀족은 무인이라기보다 오히려 문인이고 그 성격상 본질적으로 지식계급이다. 화북을 제압한 이민족의 지배층은 원래 무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점차 지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으로 변모해 갈 수밖에 없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일이 잦았음에도 문인이 무인을 끝내 억누른 것은 위진남북조시대가 낳은 또 다른 역설이다. 후한이 무너지고 지식인들은 여러 정권에 참여하여서 활약했다. 조조를 섬기며, 무장들이 세력을 더 키우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맡은 [[순욱]]이 좋은 보기다. 수천이 넘는 사병을 거느린 가문에서 태어난 [[이전(삼국지)|이전]]이 "유가의 단아함을 숭상하고, 재주와 덕망 있는 사대부들을 존경하며, 예의를 잃을까 두려워할 만큼 공손한" 태도로 조조 밑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는 그때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무력만 갖고서 천하를 얻을 수는 없었고, 그것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대의 혼란기를 끝내기 위해 길을 찾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도 한층 더 치열해지고, 거기서 꽃피는 학문과 문화도 깊이가 있어졌다. 뿔뿔이 흩어진 사회 속에서 무수히 생겨난 소집단의 유력자들을 독서인으로 양성하고, 국가사회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들 새로운 지식인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중국의 여러왕조, 그리고 이후의 통일제국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위진남북조시대는 암흑기였다. 카와카츠는 [[문벌귀족]]이 기나긴 난세에서 중국 문명을 강인하게 지켜 내고, 발전시킨 중심축이라고 추켜세우지만, 한편으로는 국사에 무관심하거나 실무에 무능한 귀족들도 적잖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지만 위진시대에는 가문만 믿고 잘난 체하는 헛똑똑이로 살다가는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낭야 왕씨와 함께 명문으로 손꼽히던 진군 사씨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사안이라는 명재상이 나온 진군 사씨는 동진 시기에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그 힘을 시나브로 잃으면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이 세워진 시기에 오면, 옛날과 달리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정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사실 의외로 문벌귀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의 관료제를 구성한 구품관인법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사라진체 붕괴하여 서한 초기의 임자제로 퇴보하고 황제의 가문조차 오래된 문벌귀족보다 가문의 격이 달린다고 비웃음 받았던 수당시대였다.] 위진남북조시대를 평가하면서 폭군, 혼군, 암군이 여느 때보다 자주 나타나서 백성들을 괴롭힌 일도 빼놓기 어렵다. 물론 그 속에서 과거제처럼 새 시대를 여는 요소가 싹텄고, 이것이 뒷날 '세계 제국'으로 불리는 수당 제국이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하였음은 분명하다. 호한(胡漢)이 갈등을 겪으면서 공존을 위한 길을 모색한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억조창생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견뎌야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안의 봄'을 기다리며, 아름답게 보이면서도 모질고 사납게 느껴지는 '겨울'이 지나가기를 바란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