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징 (문단 편집) == 생애 == 거록 사람으로 무양군의 군승 원보장의 전서기로 있다가 원보장에게 투항하는 편지를 써줘서 [[이밀]]에게 귀순했으며, 이밀 휘하에서 문한을 관장했고 [[우문화급]]과 싸운 후에는 장사 정정에게 왕세충은 먹을 것이 부족하니 뒤쫓아서 공격하면 승리할 것이라 진언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자 이밀을 따라서 [[당나라]]에 투항했고 위징은 비서승에 임명되어 [[이세적]]에게 편지를 보내 당나라에 투항시켰다. 619년에 원보장을 설득해 당나라에 투항시켰으며,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하자 붙잡히고 두건덕으로부터 기거사인에 임명되었다가 도망갔으며, 622년에 선마를 지냈고 유흑달의 무리들을 붙잡자 그들을 사면하면 유흑달의 무리들이 흩어질 것이라 진언해 그의 말대로 해서 그 말처럼 되었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항상 [[태종(당)|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했지만 이건성이 626년에 [[현무문의 변]]으로 살해되고 이세민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 것에 대해 묻자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자신의 말을 쫓았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했으며, 위징은 첨사주부에 임명되었다. 이건성, [[이원길]]의 죽음에 관한 일의 수습을 위해 가을 7월 11일에 산동에 파견되어 위로하고 다녔으며, 이건성, 이원길을 장사지내면서 묘소까지 배웅해 호송했다. 위징은 당태종이 다스리는 도에 대해 찾자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봉덕이가 16살의 장정을 살펴보아 군사로 쓰는 것을 상주하면서 당태종이 이를 쫓으려다가 간의대부를 지내던 위징은 반대하면서 칙령에 서명하지 않게 했다. 627년에는 영남의 추장, 담전 등이 조정에 들어오지 않은 일에 대해 군사를 동원하려는 것을 반대했으며, 믿을만한 신하를 파견해 정성을 보여주면 이들을 복종시킬 것이라 했고 우승을 지내던 위징은 비단 500필을 하사받았다. 위징은 여러 차례로 당태종에게 간언해서 그 간언한 내용이 기록으로 많이 남을 정도이며, 이에 대한 일화로는 당태종이 좋은 새 한 마리를 얻어 어깨에 올려놓고 멀리서 위징을 보자 품 속에 감췄다가 위징이 사건을 상주하는 것이 길어져 그치지 않자 새는 끝내 품속에서 [[질식사]]한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다른 판본에는 위징이 품 속에 새를 감춘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상주를 길게 했고, 이로 인해 새가 죽자 태종이 화를 낸 것을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라고 하는 얘기가 전해온다. 628년에 [[방현령]]과 함께 신례 138편을 제정해 올렸고 629년에는 상서우승에서 수비서감으로 임명되었으며, 당태종은 위징이 자신을 욕한다고 해서 화내는 일이 많았지만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 636년에 눈병이 나서 산관이 되기를 청구했다가 특진에 임명되었고 642년에 위징이 병에 걸리자 위징의 집에 마루가 없는 것을 보고 당태종이 이를 짓게 하면서도 궤안, 지팡이 등을 하사했다. 위징은 태자태사에 임명되었고 병이 조금 나아지자 이를 사양했지만 당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643년 정월 17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당태종이 백관 중에서 9품 이상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게 했고 새의 깃털로 장식한 의장, 의식용 악대 등을 제공하면서 소릉에 배장했는데, 그의 처인 배씨가 위징이 평생 검소하게 산 것을 이야기해 일품의 우보를 갖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죽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두 받지 않고 포를 친 수레에 영주를 싣고 가서 장례를 치렀다. 위징은 평소에 당 태종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기에 그로 인한 태종의 스트레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위징의 사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은 후에 상소문을 미리 사관 저수량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태종은 그동안 위징이 역사에 명성을 남기기 위해 자신에게 간언을 하며 자신을 괴롭힌 것이라 생각하고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격노하였다. 때문에 당 태종은 위징의 장남인 위숙옥에게 자신의 딸인 신성공주(新城公主)[* 21녀로 문덕황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마지막 딸이다. 위징이 죽은 643년에 약혼을 시키고 동년에 바로 파기한다. 이 때 나이 10세. 이후 16세가 되는 해에 문덕황후와 같은 가문인 장손씨인 장손전(長孫詮)에게 시집가나 당태종의 서거로 혼례가 중단되어 3년 뒤 완료된다. 이후 26세때 장손전이 실각하여 유배후 사사당할때 위정구(韋正矩)에게 재가하나 4년 뒤 병사한다.][* 신성공주의 사망은 당시 공주의 친오빠이기도 했던 [[고종(당)|고종]]의 심문결과 남편 위정구의 가정폭력으로 인한 것으로 밝혀져 남편을 처형하고 가족들을 유배보냈지만 실제는 원래 병약했던 편이었고 이로 인해 급사했다는 쪽이 유력하다. 실제로 백성들 사이에 공주와 결혼해서 화를 뒤집어쓴 것을 비꼬는 이야기가 돌았고 사람들이 공주와 결혼하여 오히려 가문이 화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와 같은 사료에서도 당 고종 자신이 남편 위정구를 신성공주와 같은 무덤에 합장하도록 지시한 것을 들어 이미 당나라 시기에서도 여동생의 급사에 상심한 당고종이 죄를 덮어씌웠다는 시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를 시집보내겠다는 약속을 파기했을 뿐 아니라, 위징이 죽은 후에 그를 위해 세운 묘비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후에 위징의 충고를 어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맛보고 씁쓸히 후퇴할 적에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말렸을 텐데..."라며 후회하였고, 결국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워주었다. 이 때문에 위징이 당시 당나라의 부병제와 기미지배 체제의 치명적인 단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제 아무리 동아시아 최강국인 [[고구려]]가 [[지역강국]]이라도 중국에 미칠 수 없었다지만, 당이라도 [[고구려]]를 상대로는 결코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의 전쟁은 [[신라]]의 도움으로 겨울을 보내는 등 명백한 장기전이었다.] 이는 곧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자영농인 부병들의 경제적 기반이 몰락하게 된다.' 는 부병제의 단점과 연결된다. 또한, 혹시라도 당이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주춤하게 되거나 혹여 패전이라도 하게 되면 강력한 군사력 과시를 통해 유지되던 기미주들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고, 이는 곧 기미지배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고구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당군의 진격이 주춤하게 되고 끝내 [[안시성 전투]]에서 패전하게 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결국 당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도 멸망 직전의 [[고구려]]를 끝내 온전한 자력만으로는 멸망시키지 못했으며, [[연개소문]]의 아들들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인해 배신자가 등장하게 되고 나서야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에서 약점을 노출한 당나라는 토번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부병제가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당나라라고 해도 결코 소요가 없던 것은 아니라 [[측천무후]]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측천무후 시기에 기미지배마저 붕괴된다. 대표적으로 돌궐 제2제국의 등장과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의 독립이다.] 당태종은 위징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세 개의 거울 중 한개를 잃어버렸다, 세 개의 거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의관을 보는 거울, 둘째는 패망한 역사를 보며 배우는 정치 거울, 셋째는 그릇됨을 비추는 거울 ‘위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