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징 (문단 편집) == 기타 ==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김유신]], [[백제]]의 [[성충(백제)|성충]],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 명성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또 이는 [[아스카 시대]] 일본이 [[중국]], [[한반도]], [[만주]]와 자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조선시대]]의 [[신숙주]]가 이 사람에 비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조선)|세조]]가 "[[한명회]]는 나의 [[장량(전한)|장량]]이요,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다"라고 말했으며, 말년의 신숙주가 영의정에서 물러나려 하자 정희왕후가 "세조대왕께서 경을 위징에 비견하셨거늘 어찌 이리 나오시오?"라고 만류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당태종에게 강직한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위징과 세조에게 [[예스맨]]스러운 처신으로 일관한 신숙주는 인물상이 사뭇 다르지만, 위징이 당태종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신숙주 역시 세조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이렇게 비견된 것. 한편으로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띄우면 세조 스스로가 당태종 같은 군주가 된다는 자뻑스러운 목적도 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세조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중국의 옛 신하들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당태종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세조 자신은 정작 당태종보다 능력은 훨씬 아래고, 패륜스러움은 몇 술은 더 뜨는 인간이었지만. 당태종은 능력이 좋으면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일지라도 살려줬지만 세조 치하에서 '''[[세종(조선)|세종대왕]] 때의 브레인'''들은 거의 다 죽어서 정인지, 신숙주 등 몇몇만 살아남았다. 자세한 것은 [[세조(조선)|세조 항목]] 참고. 섬기는 군주의 반대 쪽 세력에서 활약했으며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관이오|관중]]과 비슷한 면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