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표 (문단 편집) == 생애 == 구 [[위(전국시대)|위(魏)나라]] 왕족 출신[*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전담처럼 방계 왕족이나 혹은 성씨가 같음을 착안해 왕족을 사칭한 경우도 있었지만, 위표의 형 위구(魏咎)는 위나라 때 영릉군(寧陵君)으로 봉해진 바 있으므로, 이들 형제는 왕족이 분명하다.]이나, [[진승]](陳勝)의 봉기 전까지는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진승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초의제]]나 [[항량]]일가처럼 초야에 숨어지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진승은 휘하의 장수 주불을 보내 옛 위나라 땅을 평정하고 주불을 위왕에 앉히려 했으나, 주불은 왕족 출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며 사양한다. 그리하여 위표의 형인 위구가 위왕으로 옹립되고, 위표도 이때부터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위나라 부흥의 꿈도 잠시, 진승의 세력은 금세 와해되고 진나라 장수 [[장한]]의 무서운 토벌이 시작되었다. 관중 근방인데다 아직 세력이 약한 위나라는 바로 토벌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와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에 원군을 청했지만, 임제에서 원군으로 온 제왕 전담이 전사하고 항타, 전파가 이끄는 초나라의 원군도 격파되고 만다. 그리하여 위구는 군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결하고, 위표는 도주했다. 이후 위표는 초나라에서 객장 비슷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위표팽월열전〉에 따르면, [[거록전투]] 전후 위나라 땅의 20여성을 수복해 장악했고 [[항우]]의 입관에 종군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초지제월표〉에 따르면 거록전투 이전에 이미 평양을 서울로 삼고, 위나라를 재건해 [[거록전투]]에 원군을 보내었다고 해 시점이 맞지 않는다. 어쨌든 '''항우와 함께 함곡관에 입성'''한 것은 분명하며, 진나라 멸망 후 서위왕(西魏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옛 위나라 전역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옛 위나라의 수도 대량과 동쪽을[* [[삼진(전국시대)|삼진]]중 [[조(전국시대)|조]]와 [[한(전국시대)|한]]은 땅이 한 덩어리였지만, 위는 한의 영토를 경계로 동서가 커다란 [[월경지]]로 나뉘어 있었다. [[진(희성)|진]]이 아직 한 나라였던 시절 세력다툼에서 다른 가문, 특히 범씨와 지씨의 세력권을 조, 한과 나누는 과정에서 가장 서쪽에 치우쳐 있던 위가 거의 원래 영토에 준하는 크기의 커다란 월경지를 얻게 된 것이다. 월경지를 없애고 회랑을 만들기 위해 한과 영토 교환 협상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 점이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는데, 서쪽의 [[진(영성)|진]]이 급성장해 서쪽 본토가 밀리던 도중 한을 방패삼아 [[카이펑시|대량]]으로 천도할 수 있었다. 그 대량을 포함한 동쪽이 항우에게 제공된 것이다.] 서초패왕 항우에게 양도한 분봉이었다. 곧 세상은 다시 어수선해졌고, [[한고제|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탈환해 동진한다. [[사마흔]], [[동예]]가 항복하고 [[장한]], [[정창]]이 격파되는 상황에서, 위표는 친히 군마를 이끌고 '''유방에게 투항'''한다. 그런데 유방이 [[팽성대전]]에서 참패하자, 위표는 형양에 함께 있다가 부모의 병환을 핑계로 영지로 돌아가 '''초에 붙어 한에 반기'''를 든다. 정치적으로 보면 대패한 한의 역량이 못 미더워서겠지만, 이에는 좀 황당한 다른 이유가 있다. 위표는 당시 유명한 관상쟁이 허부로부터 자신의 첩 [[고황후 박씨|박희]](薄姬)가 '''천자를 낳을 상'''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유방은 [[역이기]]를 보내 설득하지만, 이번에는 '유방 그 인간은 욕이 너무 심하고 사람을 순 노예처럼 대해서 싫다.'고 거부하여 실패하고[* 위표의 형인 위구 때문에 위표의 대접이 특히 나빴을지도 모른다. 위구가 [[옹치]]에게 바람을 넣어서 유방을 통수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 옹치한테 뒤끝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를 생각하면.(...)] 결국 [[한신]]이 파견되어 [[안읍 전투]]에서 위표를 격파한다. 위표의 영지는 하동군으로 재편되어 위표는 졸지에 영지까지 몰수 당하게 된다. 이때 박희는 한나라의 베 짜는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방의 후궁이 되어 [[한문제]]를 낳았으니 결과적으로 예언 자체는 완벽히 들어맞은 셈. 그러나 사기 위표팽월열전이나 한서의 위표전담한신열전에는 점쟁이 어쩌고 하는 기록이 없다. 상식적으로도 난세에 몸을 일으켜서 일국의 왕까지 된 사람이 일개 관상가 말 하나에 좌우될 정도로 귀가 얇았을 가능성은 높지 않고, 나름대로 정세분석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고대 사서의 흔한 클리셰로, 거의 후대의 창작이 많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허나 재미있게도 유방은 위표의 아내인 박희를 빼앗아 자신의 후궁에 넣은 후에도 전남편인 위표를 죽이지 않고 계속 막하에 부하로 두었다. 심지어 기원전 204년 유방은 [[기신]]의 희생으로 도주할 때 형양 수비를 [[종공]], [[주가]], [[한왕 신]] 그리고 위표에게 맡긴다. 형양 수비군은 유방의 도주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는데 충의로운 자를 남겨도 모자를 판에 위표를 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사실 유방은 이전에도 자기 기반이나 마찬가지인 풍읍을 자신과 사이가 안좋았던 옹치에게 맡겼다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다만 위표를 둔 것은 그냥 버리는 말로 쓸려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농성전에서 못믿을 사람이 끼어있는것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아군 병사들부터가 불안해서 제대로 싸울수가 없다.[* 한 번 배신한 이상 실권은 없었을 것이며 주가, 종공, [[한왕 신]]은 믿을만하고 위표가 헛짓을 못하게 둘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종공과 주가는 모의하여 "나라를 배신한 적이 있는 왕과 함께 성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위표를 죽이게 된다. 그렇지만 유방보다 훨씬 과격한 항우의 성격상 자신을 배신한 놈을 살려둘 리가 없으니 종공, 주가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항우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