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혜공 (문단 편집) === 좌, 우 공자에게 쫓겨나다 === 위혜공 원년(기원전 699년), 2월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가 [[정나라|정(鄭)나라]]에 여러 차례 뇌물을 요구하자[* 그 자세한 내막은 [[정여공]], [[송장공]] 문서 참조.] 그 요구에 견디지 못한 [[정나라]] 측에서는 [[노나라|노(魯)나라]], [[기나라|기(紀)나라]]와, 송나라 측에서는 위(衛)나라,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 [[연(춘추전국시대)|연(燕)나라]]와 각기 합쳐 서로 싸웠는데, 송나라 측이 패했다. 3월 위혜공은 아버지 위 선공의 장례를 치렀다. 위혜공 2년(기원전 698년), 송나라는 위나라, 제나라, [[채나라|채(蔡)나라]], [[진(춘추전국시대)|진(陳)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다시 쳤다. 그리하여 정나라의 거문을 불사르고 정나라 도성과 동쪽 교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송나라는 그 서까래를 약탈했다. 위혜공 3년(기원전 697년), 위혜공은 [[노환공]], 송장공, [[진장공(규성)|진장공]](陳莊公)과 함께 이 땅에서 회맹해 정나라를 치려 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는 패배해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위혜공 4년(기원전 696년), 위혜공은 노환공, 송장공, [[채환후]]와 조나라에서 회맹했고, 다시 정나라를 치려 했다. 4월 제후들과 정나라를 쳤다. 그런데 위나라 내부에서 위혜공이 급자를 죽인 일로 인해 민심을 잃자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은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태자 급자의 동생인 검모를 세웠다. 이에 위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후 검모 7년(기원전 689년), [[노장공]]은 제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4개국과 연합해 위나라를 쳐서 위혜공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위후 검모 8년(기원전 688년), [[제양공]]은 [[주장왕]](周莊王)의 명으로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좌, 우공자를 죽이고 위혜공을 복위시켰다. 위후 검모는 주나라의 수도 낙읍으로 망명했다.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것이었다. 위혜공 20년(기원전 680년), 위혜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견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1년(기원전 679년), 위혜공은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견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2년(기원전 678년), 정나라가 송나라를 치자 위혜공은 송나라, 제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12월 위혜공은 노나라, 제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위혜공 25년(기원전 675년), 위혜공은 주 왕실에서 검모를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남연과 함께 주나라를 치는 간 큰 짓을 한다. 이에 [[혜왕(주)|주혜왕]]은 온읍으로 달아나고 그들은 [[희퇴|왕자 퇴]]를 세웠다.[* [[희퇴]] 항목에 나오듯이 일은 실패한다.] 위혜공 31년(기원전 669년), 5월 계축일 위혜공이 죽고 공자 적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학덕후로 유명한 위의공이다. [각주] [[분류:위(衞)나라의 군주]][[분류:기원전 669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