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혜왕 (문단 편집) === 즉위 초기 === 위 혜후 2년(기원전 368년), [[공숙좌]](公孫痤)가 한나라 및 조나라와 회수의 북쪽에서 싸워 조나라의 장수 악조를 사로잡고 공을 세우자 밭 1백만을 상으로 내렸는데, 공숙좌가 사양하면서 [[오기(전국시대)|오기]]의 가르침과 파녕, 흔양 등에게 공을 돌렸다. 이에 위혜후는 오기의 후손을 찾아 밭 20만을 상으로 내리고, 파녕, 흔양에게는 밭 10만을 내리면서 공숙좌에게는 밭 40만을 더해 모두 밭 1백 40만을 상으로 내렸다. 위 혜후 4년(기원전 366년), 택양에서 한나라의 군주와 회동하고, 무도에 성을 쌓았다. 위 혜후 9년(기원전 361년), 공숙좌가 병석에 눕자 혜후가 문병을 갔는데, 이때 공숙좌가 [[상앙]](商鞅)을 천거했지만 혜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왕족인 공자 앙도 상앙을 적극 추천하였지만 역시 듣지 않았다. 이때문에 상앙이 서쪽의 진(秦)나라로 도망가 개혁을 진행하여 진나라를 부강시켰다. 훗날 강성해진 진나라에 패하여 영토를 빼앗기자 공숙좌의 유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 혜후 13년(기원전 357년), 조나라의 군주와 호 땅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14년(기원전 356년), [[노나라|노]](魯), [[위(춘추전국시대)|위]](衛), [[송(춘추전국시대)|송]](宋), [[정나라|정]](鄭) 등의 군주들에게서 조현을 받았다. 혜후는 제후들을 범대에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는데 노공후가 나라를 망치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자 혜후는 노공후를 칭송하면서 그가 말한 것을 경계로 삼았다. 위 혜후 15년(기원전 355년), [[진효공]](秦孝公)과 두평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19년(기원전 351년), 한단을 조나라에 돌려주면서 장수에서 맹약을 맺었다. 위 혜후 21년(기원전 349년), 진나라 군주와 동 땅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27년(기원전 343년), 중산군을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