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황후 (문단 편집) == 평가 == 위씨는 시어머니 [[측천무후]]에 비할 바 없이 전반적인 면에서 능력이 크게 뒤떨어졌다. 어느 설을 채택하든 결국 살해당한 역사의 패자라는 점에서 정국 장악력은 결코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감각, 처세술 등 크게 부족한 능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던 셈이다. 측천무후는 항목에 설명돼 있듯이 악행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행했다는 다수의 악행이 사료간의 교차 검증이 안 된다.] 훗날 손자 [[당현종]]이 이룩한 "개원의 치"라는 [[당나라]]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을 만큼 통치력 자체는 괜찮았으나 위황후는 이러한 능력도 전혀 드러난 바 없다. 무엇보다 남편도 살아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간통을 펴고 태자를 죽이면서 남편과의 관계를 스스로 파탄냈고 그녀를 싫어하게 된 남편이 친정에 나서자 오히려 앙심을 품고는 딸과 함께 남편을 독살하여 [[당현종|정적]][[태평공주|들의]] 반격 명분을 자발적으로 갖다 바치고 말았다. 사실 측천무후는 수많은 [[남총]]을 두었지만 그것은 남편 [[당고종]]의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고,[* 더욱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남총들의 단속에 신경을 썼다.] 당고종 생전시에는 신하들에게 '성격은 좀 강해도 현명하고 믿을 만한 황후마마'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직접 당고종의 병수발을 행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아내라는 것을 수없이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황제의 아내인 황후이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여주었다. 측천무후가 고종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떼고 자신의 생각대로 정치를 행한 것은 황제 즉위 후에도 몇 년이 지난 뒤로 통치기간 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그 시기에 이르러서도 남총이 대놓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당가화에 실린 일화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남총으로 총애를 믿고 황족들 앞에서도 거만하게 굴던 설회의(薛懷義)가 하루는 조정의 남문으로 들어오다 복야(僕射, 재상)인 소량사(蘇良嗣)와 마주치고도 인사도 안 하고 지나치자, 빡친 소량사가 "너 뭐하는 놈이야?" 하고는 설회의를 잡아다 [[따귀]]를 쳤다. 설회의는 측천무후에게 달려가 울고불고 다 일러바쳤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그러게 다른 대신들 눈에 안 띄게 북문으로 들어오라니까, 왜 대신들도 많이 오가는 남문으로 들어와서 안 맞아도 될 매를 버냐?" 하면서 소량사를 벌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위황후는 측천무후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말기 시절에야 조심스럽게 행한 짓들을 황후 위치에 있을 때부터 대놓고 행하는 전혀 신중치 못한 행동을 보여줬다. 그러니 그런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더 많았을 것이고 그녀의 죽음은 어찌보면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권력장악 능력도 시어머니 측천무후에 비하면 아주 바보가 따로 없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장악할 때 수단은 냉혹했어도 정적들의 상황을 보면서 교묘하게 명분을 잡으면서 세력을 축소시킨 다음 숙청하였는데 위황후는 정적들이 건재했었는데도 상황을 보면서 그들의 세력을 위축시키려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황제를 독살한 대역죄인이니 날 잡아 잡수쇼하고 정적들에게 공격할 명분만 만들어주고 노골적인 자살골만 넣었다. 중국사에서 위황후와 비슷한 인물로는 역시 악녀로 평가받는 [[가남풍]]이 있는데 권력 얻은 후의 막장 행보와[* 가남풍도 음란하기 짝이 없었고 특히나 의붓 아들인 사마휼을 사람을 시켜 때려죽였는데 이게 명분이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비참한 최후는 같지만[* 둘 다 일족이 멸해졌지만 그나마 개인 측면에서는 가남풍은 곱게 자살당했을 뿐 위황후는 살해당한데다 시체가 갈기갈기 찢기기까지 했으며 시호는 커녕 폐서인되었다.] 그래도 가남풍은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는 제법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둘 다 똑같이 남편이 멍청하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위황후는 그런 남편을 꼬드겨 무리하게 권세를 얻으려고 했다가 망했고 복귀 후에도 그리 대단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않은 반면 가남풍은 황태자비 시절에는 남편인 사마충을 시험해보는 시아버지 사마염을 속여먹였다. 사마충이 백치인지라 사마염도 이게 염려되어서 얘가 황제 자리 받을 자격이 되나 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를 안 가남풍이 시험관을 매수하였다. 그런데 이 때 사마휼이 너무 잘한 것으로 보이면 안 믿을 것을 알았는지 낙제를 간신히 면할 수준으로 조작했다. 이후, 황후 시절에는 권세를 누리던 양염을 사마위, 사마요를 시켜 제거하고 그러면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량과 위관을 중용해 사마위의 불만이 높아지게 한 뒤 사마위에게 밀서를 보내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고 이에 대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이를 빌미로 사마위까지 제거했다.][* 다만 그렇다고 가남풍의 정치력이 측천무후마냥 대단했던건 아니다. 가남풍도 딱 권력 잡는 과정에서만 유능했을 뿐 그 이후부터는 위황후처럼 무능했다. 그러니까 측천무후는 정치적 능력과 국정 운영 능력이 모두 좋았지만 가남풍은 권력 잡을 때까지만 정치적 능력이 있었고 국정 운영 능력은 딱히 없었지만 위황후는 둘 다 없었다. 기실, 진혜제는 정말 지적장애로 추정되는 멍청이고 서진사회가 문벌귀족, 황족 등이 날뛰기 딱 좋은 상황이라 가남풍이 나서는 것이 마냥 명분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당중종은 지능 자체는 정상인이고 사람에게 잘 휘둘리는게 문제긴 한데 그 문제도 측천무후의 존재를 감안하면 적어도 측천무후가 사망하는 705년까지는 위황후가 납작 엎드리고 있어야 했다. 어쨌든 황실 최고어른은 대비-황제였던 측천무후였던 관계로 위황후 '따위'가 비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 즉 당중종이 문제가 있어도 그걸 교정하는건 측천무후의 역할이지 위황후의 역할이 아니다. 고로 가남풍은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을 지 모르나 위황후는 그런게 없었다. 그나마도 측천무후 사후에는 이미 아버지인 위현정을 재상으로 만들려고 꼬드겼다가 망했던 일 등으로 인해서 가남풍처럼 '그래도 나는 황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같은 최소한의 명분조차 만들 수조차 없는 실정이다. 당중종이 워낙 위황후에게 휘둘리는 인간이라 무사했지 당현종, 하다못해 당예종 같은 인물이었다면 진즉에 쳐냈을 것이다.] 그나마 가남풍의 시절에는 그 자신이 그 정도는 되었는지 아니면 사후에 벌어지는 [[팔왕의 난|막장]] [[영가의 난|전개극]] 때문인지 천하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았던 시절이라고 평가받기라도 하는데 위황후는 그런 것도 없다. 인재도 그래도 가남풍은 적절한 인재들을 섭외했다 숙청했다를 반복했는데 위황후는 무조건 숙청만 했다.. 게다가 정말 일부에서는 가남풍을 외척과 황족으로부터 황권을 지켰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며 특히 가남풍이 살던 시절인 서진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는 최악의 막장국가를 달리는 나라인데 그 나라를 무려 '''10년'''이나 이끌었다. 하지만 위황후는 5년으로 가남풍의 절반이며 당나라도 현종 이후에는 막장화가 진행되지만 위황후는 그 현종 이전의 시기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