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윈난성 (문단 편집) == 역사 == [[춘추전국시대]] 말기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 장군 장교가 여기를 정벌했다가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이곳 풍속을 따르고 전왕을 자처한 것이 [[중원]] 세력과의 첫 접점 기록이다. 이후 [[한나라]] [[한무제]] 시기 처음으로 중국의 통일왕조 치하에 들어왔고 [[익주]]에 편입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이 [[왕]]으로 나오고 정글과 독천으로 뒤덮인 [[남만]]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남만이란 개념 자체는 중국 남부 및 남방의 지역, 나라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남만 세력'이 이곳이다. 엉뚱하게도 중세 시대 일본에서 이 남만 개념을 받아들여서, 교토의 귀족들(그들은 교토를 [[낙양]]이라고 불렀다.) 은 현재의 규슈 지역을 남만이라고 칭했고 그 이후 에도시대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들을 남만인이라고 칭했다. 서양 사람들의 상선이 동남아시아를 돌아서 남쪽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칠종칠금]]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촉한]]의 남만 토벌은 사실이지만 독사와 전갈이 득시글대는 정글로 묘사되는 연의의 서술은 [[나관중]]의 창작인데, 중세까지 중국인들이 윈난을 어떤 이미지로 생각했는지 정도는 참고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연의에서 한족 관리 출신으로 나오는 [[고정(삼국지)|고정]]이 월수군 수족의 왕이었고, 맹획은 '''한족 출신'''으로 윈난성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과 세력을 갖춘 호족으로서 독립 국가를 세우려고 반기를 들었다가 225년 [[촉한]]의 [[제갈량]]에 의해 평정되면서 남중은 촉한의 통치에 들어온다. 일종의 준자치구가 됐다고 보면 될 듯. 이후 이곳에서 소수나마 군마가 나온 덕분에 촉한의 기병 전력 보충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곳은 서진 시기인 271년에 익주에서 영주(寧州)로 나뉘었고 옛 촉한 남중 지역의 4군을 거느렸는데, 그 땅은 대략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 해당한다. [[동진]], [[유송]], [[남제]] 영주 관할에는 지금의 윈난성 전역, [[구이저우성]] 중서부 지역이 있다. [[양(육조)|양]] 중기 이후 폐지되었다가 [[서위]]([[북주]])가 554년 남영주(南寧州)를 세웠다가 수나라 초에 남영주총괄부를 두었다 폐지하고, 그 땅은 [[남조(왕국)|남조]]의 전신인 육조가 차지했다. 한편 당나라는 이 지역의 남영주총괄부를 이어받아 남은 지역을 남영주(南寧州)라고 칭하고. 치소를 미현(지금의 윈난성 취징시 서북쪽)으로 했으며 634년에는 낭주(郎州)로 개명했다가 717년 남영주로 다시 개칭했고 당현종 천보말년인 754년 이곳도 남조에 점령되어 석성군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남조(왕국)|남조]], [[다리 바이족 자치주|다리]] 왕조([[대리국]])가 있었던 곳인데 [[몽골 제국]]이 멸망시킨 후 운남등처행중서성(雲南等處行中書省)을 세웠다. [[원나라]]는 이 지역에 이후 [[부하라]] 출신 [[색목인]] 관리 아잘 샴숫딘 우마르를 파견하여 [[쿤밍시]]를 건설시켰다. 아질 샴숫딘은 쿤밍 시를 다스리는 동안 모스크를 두 개 건설하였는데, 한동안 이 지역은 원나라 무슬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나라 말기 운남에 고립되어 있던 몽골 괴뢰정권인 양왕(梁王)의 정권을 명나라 홍무제가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에서 몽골 황족들을 도우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리 단씨는 양왕국을 배신하고 명나라에 붙어 그 공으로 재독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대리의 은광산에 눈독을 들인 홍무제 주원장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운남등처승선포정사사(雲南等處承宣布政使司)를 세워 1390년에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나라는 대리 단씨를 비롯한 [[바이족]]을 귀속시킨 이후로도 대리국의 왕족들에게 계속해서 총독, 진무 같은 벼슬을 주면서 현지의 토사(土司)로 삼았다고 한다. 그 밖에도 [[명나라]] 대에는 이 지역 [[먀오족]]과 [[야오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 진압 구실로 [[나하추]]가 이끄는 귀순 몽골군들을 대거 파견하여 열대성 질병으로 죽게 만든 적도 있고 당대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자로 올라선 [[미얀마]]의 [[따웅우 왕조]]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 지역 [[후이족]]들이 자체적으로 격퇴하였다. 19세기 중반 청조 말에는 할아버지 대에 한족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두문수(杜文秀)가 [[바이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평소 바이족과 사이가 나쁘던 [[나시족]]을 학살하고 잠시나마 윈난 성을 거점으로 술탄으로 즉위하여 [[평남국]]을 건국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중원]]'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윈난성은 중국의 세력이 약한 지역이었고, 확실하게 중화제국에 편입되어 중국의 영토로 인식된 역사는 [[원나라]] 이래로 꽤 짧은 편이다. 그리고 윈난 서북쪽 고지대는 [[티베트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민족, 역사, 지역색이 뚜렷하게 다른 소수민족 지역에 비해서는 한족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이 섞여있기 때문에 [[분리주의]]는 거의 없다. [[위안스카이]] 집권, [[호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탕지야오]]가 창시한 [[전계군벌]]이 지배했고 [[북양정부]]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며 맞서는 반독립적인 지역(자체적인 윈난 화폐, 윈난 애국주의 교육 등)으로 남았다. 이후 [[룽윈]](용운)이 지배권을 잡았으나 [[장제스]](장개석)가 영도하는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강대해지면서 중앙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중일전쟁]] 중에는 중앙에 복종하여 항일전을 수행했으며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했을때 버마와의 접경 지역 일부가 점령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국공내전]] 중에 룽윈을 비롯하여 전계군벌 세력이 숙청되면서 중앙에 반감을 품고 공산당에 투항하게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게 되었고, 일부 [[중화민국군]] 병력이 국공내전 이후에도 [[버마]]로 넘어가 이곳을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이어가서 1950년대에는 충돌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