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관순 (문단 편집) == 생애 == 1902년[* 한때는 1903년이나 1904년이라고도 하였는데, 최근에 정확히 1902년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그래서인지 [[2010년대]] 이전 위인전 연표에 [[1904년]]에 태어났다 기록된 자료가 다수였다.]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언니 유계출은 [[이복형제|모친이 다르다]] ] [[충청남도]] [[공주시|공주]] [[영명고등학교|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본명]]은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공주시에서 활동하다 교우를 심방하고 오던 남편이 병에 걸려 [[순직]]하자 혼자서 활동했다.] 부인의 권유로 [[서울특별시|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로 된 학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김란사|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학교 바로 옆에 [[덕수궁]]이 있는데, [[고종황제]]가 붕어하면서 술렁거리고 혼란스런 분위기가 [[이화학당]]까지 들렸다고 한다. 오늘날도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는 덕수궁 옆에 있다.] 교장 룰루 프라이[*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에 [[신촌]]으로 이전해 1946년,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실제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의 지휘자는 [[조인원(1864)|조인원]]([[조병옥]] 선생의 아버지)이다. 참고로 조병옥 선생은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영명고등학교|영명학당]]을 졸업했다.]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부터 4월 말까지 2달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운동을 3.1 운동으로 본다.] 이 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 간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이는 [[재판(법률)|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1945년|언젠가]] [[도쿄 대공습|네놈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반드시 천벌을 받고]] [[연합군 점령하 일본|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모독죄|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괘씸죄|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2007년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견 전까지는 ‘7년형 설’ 등이 유관순 지인의 입을 통해 유포되어 왔으며 [[위인전]] 등지에까지 나왔다.]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20년 4월, [[도쿄|동경]] [[영친왕|이왕세자]]와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2심은 판결문이 남아있으나, 1심은 5년형을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 [[파일:attachment/유관순/유관순1.jpg|width=100%]] || ||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a_3279_2540|#]] ||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1980년대 모 시사 [[잡지]]에서 취재한 [[서대문형무소]]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며칠 정도 가매장 후 시신을 인도했다고 한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31119&rankingSectionId=102&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01&aid=0006605921|한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0681329|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팩트체크]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 확실한 것은 [[사형]]은 아니라는 것. 애초에 사형은 정식 법 절차를 받아 집행하는 것인데, 얼마 뒤면 어차피 출소할 기결수를 굳이 복잡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했던 [[일본 제국|일제]]이니만큼 옥 중에서도 가열차게 투쟁한 유관순이 [[출소]]한 뒤에도 후환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석방 직전 불법적으로 그냥 죽여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유튜브]]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사회 전반에 유관순이 [[미꾸라지]] 고문 등 입에 올리기 힘든 각종 성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는 내용이 퍼졌는데,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말이니 절대로 낚이면 안 된다. 왜 기록이 없냐고 물으면 “일본이 그런 짓을 했던 흔적을 필사적으로 숨겨서”라고 하는데,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전체를 숨기면 몰라도 특정 방법의 고문만을 숨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시신을 수습한 이화학당 관계자들이나 친지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진 고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유관순 외에 저런 고문을 당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말그대로 '''억지'''이며 '''거짓말'''이다. 이런 것들을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조작에 취약하다는 뜻이다.]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과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0610311801381|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고 [[https://11757.tistory.com/m/16885884|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 [[http://web.archive.org/web/20190109013234/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5445|참고]].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관순의 유해를 받들어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장 전에 무덤을 훼손하고 유골을 파괴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관(장례)|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가서 보면 봉분이 아닌 6각뿔 모양의 석관묘 형태로 조성해 놓았다. 석관 각 면에는 유관순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이로 인해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위패가 안장되어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 현재 안중근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월이 지나 건물이나 아스팔트 등으로 도배되었다. 유력한 매장 장소에 대해서도 3곳이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유관순이 아우내(併川;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s-1|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1955년)|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1864)|조인원]]이다.[* 조병옥 [[박사]]는 앞서 말한 유관순 영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자기 아버지를 연상할 수 있는 인물이 찌질하게 “아, 관순이가 나서니 내가 부끄럽구나” 류의 대사를 한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現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 [[순대]]로 유명한 곳이다.]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짓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https://blog.naver.com/artistyang83/221440239869|유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https://blog.naver.com/artistyang83/221440257463|#2]]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