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양명학]] ==== [[명나라]] 후기에는 사회 혼란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자체적인 개혁론이 일어나는데, 왕양명으로 알려진 [[왕수인]]이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왕수인]]은 [[향약]]과 십가패법 보급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사회에 대한 통제와 질서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는 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양명학]]으로도 통칭되는데, 이는 왕수인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으로, [[주자(철학자)|주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주자학]]과 동일한 맥락하에 이름지어진 것이다. [[양명학]]은 심즉리설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인]]과 [[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 속에 원리가 있다는 건 양명학과 [[성리학]] 역시 사람 안에는 '리', 즉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양명학]]과 [[주자학]]의 차이라면, 주자의 성즉리를 왕양명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요지는, 리,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는 형이상학적인 성이며 형이하학적이고 갈대와 같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물건이란 얘기다. 반면 '''왕양명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요식적 행위는 뜬구름 잡는 짓이다.''' 내가 우리집 앞마당의 [[대나무]]를 몇 달 몇 년을 보고 있었는데 '리'가 파악되기는커녕 머리만 아프고 우울증만 더해졌을 뿐. 사물을 파악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밑도 끝도 없이 '''형이상학을 궁구할 시간이면 실천적인 행동에 나서라!"''' 결론적으로 왕양명의 주장에 따르면 그냥 우리 마음인 심이 즉 하늘의 이치인 '리'이니 양지(良知)하기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그것을 올바르게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치양지(致良知), 양지에 다다름인 격물치지이다. 그 수련법은 다르나, 똑같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선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세히 구별해 보면, 주자는 우리의 마음을 기로 여기고 절대선이자 이치라 할 수 있는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 속에 또 내재되어 있는 성을 '리'로 여기고 구체적 현상인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경계했다. 왕양명은 구체적 사물인 '기'가 있다면 그 이치인 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구체적 사물인 '기' 없이는 이치인 리가 나타날 길이 없으니 리가 형이상의 세계에 고고하게 실존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사실상 기와 리는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러므로 기의 발현인 우리의 마음이 곧 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제쳐놓고 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해 봤자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외물이란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다.[* 그러나 서로간의 다름을 변별하려는 이 노력 또한 조금은 뜬구름처럼 보이는 게, 결국 구체적 행동이나 수양원리에 있어 둘의 동일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즉리라 하여 마음이 곧 이치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한다면 삼척동자라도 비웃을 터이다. 결국 왕양명도 심즉리라 하나 우리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등등을 운운하는데 이 부분에 이르러선 주자의 리와 기를 둘로 나눈 주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 왕양명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외물을 살피는 것과 같은 개수작은 관두고 니 마음이 곧 리니까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설파했다. 즉 치지, 먼저 깨닫고 나서 격물하라고 했는데 격물은 주자의 해석과 달리 했다. 주자는 격물을 사물을 바라보고 연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왕양명은 격물의 격자를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물자를 사물이 아니라 활동, 사건 등으로 해석하였으니 간단히 말하면 일 잘하라는 뜻이다. 즉 왕양명이 논한 치지격물은 격물치지, 거경궁리나 [[독서]] 등을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수행자에게 그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신분관에 차이가 생긴다. 성리학은 격물치지와 성즉리의 실행방법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내놓았다. 선지후행 자체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도덕(≒정치)의 주체가 성리학을 배우는 귀족계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심즉리와 치양지의 실행방법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들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주신 본성(혹은 천명)이 리가 아니라, 마음이 곧 리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동을 함에 앞서서 도덕을 배울 필요는 없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결국엔 도덕의 주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 결국엔 '''양명학은 신분제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후엔 급진 세력과 온건 세력으로 나누어져 사회상에 대한 담론을 논하고 서민 계층에게까지 스며드는 등 명 후기 번성하였으나 명의 멸망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따라서 청조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신해혁명]]이 벌어진 직후에는 육왕학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하여 공양학과 함께 전통 유교 시대의 끝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양수명이 육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8년 사망) 이렇게 새로운 학문을 내걸며 기존의 유교적 신분질서를 흔들어놓았다는 의의를 높이 평가받지만, 이론부터 '원리보다 행동이 먼저다'라는 양명학의 성격상, 양명학은 성리학에 이론적으로 수시로 공격받기 쉬웠다. 성리학이 [[청나라]] 말기까지 관학으로서의 패러다임을 놓지 않았던 이유. 대표적인 양명학 비판자였던 [[이황]]의 <전습록변>에선 양명학의 성리학 비판을 4방향으로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로 양명학은 "예의를 마음 밖에서 배운다고 치자, 근데 만약 내가 예의를 글로 배운다음 그냥 흉내만 낸거면 연극[[배우]]와 다를게 뭔가? 그러니까 모든 원리의 근본은 마음 아니겠나?"[* 현대의 [[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중국어 방]]과 굉장히 비슷한 주장.]는 주장으로, 이황은 여기에 대해 "예의를 연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외부세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외부(객관)와 내부(주관) 둘다 포함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으니까 두 개가 일치하는 거 아닌가? 왕양명 말대로 마음이 전부면 유교가 도대체 명상으로 도닦다가 깨우치는 [[선불교]]와 뭐가 다른가?"라고 반박한다.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양명학의 가장 큰 문제는, '''양명학 말대로면 [[자연과학]]은 없다.''' 서양에서 과학적 방법론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기반해 발전을 시작하고 경험주의는 바로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시작하라'는 것이며, 현대의 과학사상은 양명학의 내성적 격물치지가 아닌 성리학의 외재적 격물치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베이컨까지 갈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만 이르러도 왕양명과는 많이 다르다.[* [[성리학]]보다 [[양명학]]이 과학에 가까운 점이 실제로 행동하라고 촉구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양명학처럼 그냥 행동이나 하라 수준에서 끝나면 그건 그냥 기술이지 과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컨까지 갈 것도 없이 양명학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더 과학에 가깝다.] 이론과 실천이라는 틀로 따지자면 성리학은 이론을 마음 밖의 경험에서 찾아내느라 지식을 쌓는데 오래 걸리고, 실천으로 넘어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높으신 분이 되어있을 것이다. 반면 양명학은 이론이 마음 안에 있으므로 굳이 지식을 쌓을 필요 없이 아무나 마음 속 이론에 따라 실천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이론이 맞을까 라고 하면 양명학은 마음도 이(理)의 일부니까 맞다고 넘겨짚어 버린다는 것이다.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었는데, 이는 심학이 흔히 양명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다. [[성리학]]에서는 정호, 정이 형제나 주돈이 등 주희 이전의 고명한 사상가들도 많았으며, 불교가 위태롭고 유교가 흥성하려는 시절에 나타난 성리학과 큰 상관이 없는 유학자들도 재빨리 성리학의 계보에 갖다 붙였다. [[주자(철학자)|주자]]도 당대 자신과 대립하던 심학 계열의 거두 육상산이 죽자 그를 조문하고 나서 [[고자(전국시대)|고자]]가 죽었다면서[* --심영 말고-- 전국 시대의 사상가 고자. 즉 심학 계열은 공자의 정통이 아니고 고자와 일맥상통하는 이단적 학파란 얘기다.] 강렬한 오럴 어택을 가했다. 물론 왕양명의 학문적 업적 역시 주자에 비해 밀렸다. 주자는 당시까지의 유교사상을 거의 집대성해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이루었으며 온갖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등 업적이 다대했으나 왕양명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또 왕양명의 후계자들 역시 사상적으로는 변변치가 못해 [[불교]]나 [[도교]]의 논설을 끌어다 쓰거나 유불도 일치점 따위의 학설을 논했으니 당시엔 핫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굉장히 사변적인 관념론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의 양명학 흐름에 반대하며 경세치용의 학의 기치를 세우고 들고 일어난 동림당 등 여러 실학파도 이때 일어난 것. 청대에 양명학이 쇠퇴한 이유 중의 핵심은 [[청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약점에서 비롯한 측면에 있다.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라는 이유에서 정통성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족보다도 더 굳건한 전통파 유교에 집착했던 것이다. 물론 청에서 양명학자가 어느 정도 관리로 뽑혔지만 주로 성리학자가 뽑혔으며, 그 양명학도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