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조선 건국 이전 === 한국에서는 당장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기본 개념이 수용되었으나, 관학이나 외교 문서, 고대 문헌의 해석 수단 정도에 그쳤을 뿐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교]]나 [[도교]]만큼의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신라]]의 [[독서삼품과]], [[시조(문학)|시조]] 등을 보면 이때까진 [[귀족]]들의 공부용 혹은 '''문학적 유희''' 용도의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백성들에게도 서서히 유교 사상의 비중이 높아지며 나중에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백성들도 유교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만 [[국학]] 설치로 유학을 전파하고, 중국 [[빈공과]]에 붙어 경력을 쌓고 신라에 돌아오면 관례적으로 공직에 임용되었기 때문에 [[6두품]] 미만 계층은 출세를 위해서라도 유학을 공부했다. [[화랑]]들은 유학 교리를 포함한 유불도 [[삼교]]를 모두 공부했고, 충주 출신의 유학자 [[강수]]의 예와 같이 전국 각 지방에서도 유학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남아있는 [[문무왕]]의 [[유언|유조]]는 그 내용에서 유학에 바탕한 왕도정치 사상이 적어도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완전히 자리가 잡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불교식 [[화장(장례)|화장]]을 명한 부분이 있지만, 이 역시 헛되이 재물을 쓰고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검소하게 하자는 이유임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신라에서 작은 산처럼 거대하던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던 것이 문무왕 다음대부터 고려-조선왕릉 정도 규모로 간소화된 왕릉이 조성된다.] 한편으로 [[고려시대]] 초기에는 [[과거시험]] 제도를 도입하고, 중기에는 '''[[최충]] 등에 의한 사립 학교의 건립,''' 그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국자감 지원과 [[도서관]] 성립 등으로 문생들의 수효는 증가했으며, [[향교]]의 건립도 이루어졌다. [[무신정변]]으로 한때 문신들이 몰살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곧 이들이 없으면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무신 집정자들에 의해 등용되거나 무신 유력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 예전 만큼의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무신정권]] 전반기 최고의 풍운아인 [[이의민]]조차도 이들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은 [[신진사대부]]들이 아니며''' 이들은 [[최충헌]] 사후 잠시동안의 권력 공백기간 동안 최우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최우가 등용한 세력이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와는 달리 훈고학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이다.] 최우 본인부터가 상당한 유학적 지식을 쌓은 사람이자 실력이 뛰어난 문장가였기에, 웬만한 문신들은 그를 뒤에서 업씬여기지조차 못했던 점도 한몫 했다. 이들 최씨 정권의 문신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무신정권의 옹호하에 형성된 집단'''이었으므로 [[김준(고려)|김준]]의 쿠데타로 인해 최씨정권이 붕괴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원 간섭기가 시작되어 대부분 몰락하고 일부는 [[권문세족]]으로 변모했다. 그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나포되었을 때, [[베이징]]에서 만권당을 개설한 후 [[안향]]에게 파견 명령을 내린다. 이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수입되어 최씨 정권때와는 다른 사대부 계층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민왕]]의 사회 재건 시책에 따라 [[이색(고려)|이색]], [[정몽주]] 등이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각지에서 향교를 재건했지만[* 원 간섭기부터 고려 후기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유일한 시기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의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과 그들의 후손격인 조선의 사대부들까지 무한대로 씹어댄 [[신돈]]이었다. 결국 신돈이 숙청 당한 후 원상복귀되었다.] 정작 이들은 공민왕의 타락 이후 완전히 [[멘붕]]해버려 그야말로 [[몰락]]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도 공민왕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 시국을 조롱하였을 뿐이다.[* 이는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상황과 연계해야 하는데 이들은 신돈의 옹호하에 성장한 세력이지만 결국 신돈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마침내 [[신돈]]이 숙청 당하고 다시 등장한 권문세족들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옹호 세력이라고는 일절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만을 바라보던 신진사대부 입장에선 아내 노국공주의 승하 이후 난행만 일삼던 그에 대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에 의해 잠시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우왕]]의 밀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등에 의해 이들이 싸그리 제거되었고 최영에 의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다.[* 물론 최영은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달리 도평의사사를 비롯한 정부 기관을 깔아뭉개며 권력을 유지하지는 않았기에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정국을 두고볼 수가 없었던게 아무리 최영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 군인이 되어버린데다가 불과 백년도 안 된 시점에 무신정권이라는 악몽을 경험한 그들로서는 최영의 집권을 절대로 묵과할수가 없었고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신군부의 한 축인 이성계였다.[*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이성계는 개경에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고 있던 최영과는 달리 동북면이라는 깡촌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있는데다가 믿을 것이라고는 사병을 위시한 군사력에 불과해 충분히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꺼이 이성계를 지원했다.]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정권이 붕괴되고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게 되었으나 여기서 또 이들의 분열이 이루어지는데 [[고려]]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의 국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계를 그 매개채로 삼자고 주장한 [[정몽주]]를 위시한 신진사대부와 고려 대신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성리학 국가를 만들어 나가자고 주장한 [[정도전]]의 신진사대부로 분열되어 버렸고 결국 승리한 쪽은 정도전의 신진사대부 세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