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근현대사 ===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하게 동요하게 되어 이에 따라 유교도 중대한 변화를 맞이 하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나 실제 세도정치로 권력이 일부 집단에 종속됨에 따라 '''많은 유학자들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되었다.''' 또한 외세의 압박과 더불어 [[천주교]]의 확산으로 유교의 전통적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도학의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주자학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현실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자는 움직임도 대두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학파분열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학파에 따라서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제기 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등 성리설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무엇보다도 시대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인한 의리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즉, 역사적 위기에 대흥하여 유교의 근본이념을 재인식하고 도학정신을 재천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유교질서를 재정립하려는 학문적 추구와 실천적 의지가 이뤄졌다. 이러한 입장은 위정척사파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화의론적 의리론에 입각하여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강상(綱常)의 윤리를 밝혀 서양의 침략에 대비할 것과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등 도학의 의리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점과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하여 도덕적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보여준다는 점의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 될 수 있다. 다른 일부 유학자들은 전통적 생활양식과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외국 문문을 받아야 들어야 한다는 개화론을 전개하거나, 전통적인 정신문화와 외국의 물질문명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갑오개혁]]을 계기로''' 과거제도와 신분제가 철폐되는 등 사회제도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서양식 교육제도가 일반화 하면서 통치이념으로서의 위치에서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10년 일제의 의한 국권박탈로 많은 유학자들이 자결하거나 국외로 망명했고 일부는 국내에서 심산유곡에 들어가 도학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며 대동교(大同敎), 공교회(孔敎會)[* 진암 이병헌은 공교회운동의 사상적 근거로 금문경학(공양학)을 채택하였다.]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소멸로 인한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짐과 함께 망국의 책임을 유교에 돌림으로 유교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유교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다만 도산서원 같은 경우는 총독부가 유교의 기득권을 이용해 지방 통치를 원할하게 하고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총독부와 협력하기도 했다.[[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66774/1/%ec%8b%9d%eb%af%bc%ec%a7%80%ea%b6%8c%eb%a0%a5%ec%97%90%ec%9d%98%20%e2%80%98%ed%98%91%eb%a0%a5%e2%80%99%ea%b3%bc%20%ec%a2%8c%ec%a0%88%20%e2%80%95%20%e7%b6%93%e5%ad%b8%e9%99%a2%ea%b3%bc%20%ed%96%a5%ea%b5%90%20%eb%b0%8f%20%eb%ac%b8%eb%ac%98%ec%99%80%ec%9d%98%20%ea%b4%80%ea%b3%84%eb%a5%bc%20%ec%a4%91%ec%8b%ac%ec%9c%bc%eb%a1%9c%20%e2%80%95.pdf|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 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이러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개신교]], [[가톨릭]] 등 서양 종교의 적극적 수용으로 인하여 종교학적[* 근현대사에 대해서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기에 종교학적이라고 언급했다.]으로는 그 세력을 거의 잃었다. 이는 과거에 사상으로서 경쟁 관계였던 [[불교]]와 [[기독교]]가 여전히 상당수 한국인들에게 현재진행형인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력은 [[한국인]]들의 문화양식에 스며들어 [[2020년대]] 현재까지 의례와 윤리적인 규범으로 남아 있기에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가족과 관련된 법률과 제도들은 아직도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도 아예 [[헌법재판소]]에서 유교적 전통이므로 지켜야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거부하는 실정이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규범 및 양식은 대부분 유교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향 탓에 그 이념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에 상당수 녹아있다. 연장자와 손윗사람에게 대하는 예의가 확실해야하고, 연장자는 아랫 사람에게 베풀줄 알아야 한다는 개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무례한 아랫사람이나 이기적인 윗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또 공동체의 구성원을 개개인의 연합으로 보고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최소한으로 두려는 서구권 문화와는 다르게, 공동체를 개개인보다 중시하고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걸 보면 향촌 공동체를 유교적 세상을 지탱하는 기본으로 본 성리학의 현대화된 버전으로 볼 수 있다. 한류가 열풍인 지금,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이만열 교수)는 한국이 제대로 된 문화 산업을 이끄려면 유교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비록 소수여도 우리 사회의 대안을 해외로부터 본받는 것보단 우리 안에서 그걸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유교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앞으로 유교는 전면에 나서서 조선시대처럼 사회의 중심적 구성원리로서 기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한국의 유교 문화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고 그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켜나가는 잔존 문화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한국인은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과 판단양식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윤리적 아이러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유교가 전면에서 끼치는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겠지만,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규범에 대한 영향력이 어떻게 될지는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물론 [[변질된 유교적 전통|변질된 사상으로 인한 문제점들은]] 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빠르게 개선되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