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기(명나라) (문단 편집) == [[제갈량]]과의 비교 == 촉한의 승상을 지낸 [[제갈량]]과 비교한 평가 때문인지 [[야사(역사)|야사]]에서 유기는 제갈공명과 자주 엮이며, 그래도 대중 인식에선 한수 아래로 취급받았는지 주로 제갈공명 관련 [[망신]]을 당하거나 [[데꿀멍]]하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는 편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유기는 평소 "옛적 [[제갈량]]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촉땅 만을 움켜쥔 채로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나는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내가 [[제갈량]]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며 자주 제갈량을 폄하하였다. 이후 유기가 벼슬을 내려놓고 중국을 유람하던 도중 옛 [[촉한]] 지역인 [[성도]] 주변으로 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어느 절에 묵게 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었는데 스님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절간에 웬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가와는 거리가 먼 고적한 산중의 절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궁금증을 품은 유기가 주지스님에게 "웬 절간에 닭울음 소리입니까?"라고 묻자 주지스님이 대답하기를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하루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닭]]을 한 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녘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내어 아침을 알려줍니다."[* 여담으로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사천성]] 낙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라 대답하였다. 이에 평소 제갈량을 무시하던 유기가 "그러면 나도 한 마리 빚어주겠소."라고 말하고 흙으로 닭을 빚자 유기가 빚은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이에 화가 난 유기가 제갈량이 빚은 닭을 던져서 깨자 닭 안에서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 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 모년모월모일 유기파토계)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에 유기는 짐짓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절을 나와 성도로 향했다. 이로써 유기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으나 역시 제갈량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성도에 도착한 유기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지나게 되었는데 무후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가고 걸어 지나가는 자들도 두 손을 공손히 하여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심히 보자 하마비(下馬碑)[*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그곳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돌에 새긴 비석으로 황제, 임금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가 서 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자신이 제갈량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하마비 앞에 다다르자 말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기는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도 말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땅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모사재인 성사재천|"때를 만나면 하늘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계책이라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그리하여 유기는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제갈량에게 사죄하고자 제갈량의 사당으로 찾아갔으나 [[풍수지리]]적으로 아무리 봐도 그다지 터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유기가 "제갈 선생님께서는 다른 것은 모두 잘하셨으나 풍수는 잘 보지 못하셨구나."라고 생각하고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유기 자신의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에 놀란 유기가 좌우를 시켜 자신 무릎 아래의 땅을 파게 시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충신(忠臣)은 죽어서도 주군(主君)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 실제로 [[제갈량]]의 사당은 [[유비]]의 무덤인 한소열묘(漢昭烈廟) 바로 옆에 있다.] 이에 유기는 길게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갈무후 같은 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 야사에서는 취급이 영 좋지 않지만 유백온은 병법, 정치, 문학, 사상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천재성을 보였다. 제갈량과 비교하는 것도 애초에 그가 인걸이라는 뜻. 사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제갈량의 모습도 실제론 유기에게서 모티브로 따온 것이 상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제갈량이 천기를 읽고 동남풍을 불어오는 등의 [[천문]]에 능한 부분은 확실히 유기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원말명초부터 유백온이 제갈량과 비슷하다는 말이 많아서 제갈량을 이미지화할 때 유백온의 행적을 많이 참조한 것이라는 주장인데, 나관중이 확실히 언급한 것도 아니니 정확하진 않다. 참고로 삼국연의 속 [[적벽대전]]의 모티브는 [[파양호 대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실제 적벽대전도 화공으로 조조의 군대가 크게 상하여 조조가 물러나긴 했지만 실은 육상전의 요소가 더 컸고, 전염병 등의 요소도 컸다는 걸 생각하면. 김만중의 소설인 [[사씨남정기]]에도 첫 문장에서 주인공(유한림)의 조상으로 나온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금릉 순천부 땅에 유명한 가 있었는데, 성은 유(劉)요 이름은 현(炫)이라고 하였다. 그는 개국 공신인 유기(劉琦)의 자손이라...". 유효공선행록과 그 후속작 유씨삼대록의 주인공들도 유기의 후손이라는 설정. "대명 성화 연간의 성의백 유정경은 세대명문이니 개국공신 유백온의 후예요..."[* 유기가 당대 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여길 만한 출장입상(出將入相) 스타일의 유장(儒將)이라는 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