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대인 (문단 편집) === 중세에서 근대까지 === 중세 유대인은 대개 유럽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차별을 받았다. 제대로 된 일조차 구하지 못했기에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금융업에 종사했고 이는 고리대금업을 금하는 기독교 사회 안에서는 더욱 배척받고 미움받는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기에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상업도 공업도 제약이 극심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리대금업]]밖에 없었다.[* 반면 이슬람의 교리상 돈벌이를 종교적으로 [[금기]]하는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보다는 주로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파일:attachment/유대인/4.jpg|width=100%]]|| || 왼쪽부터 평민, 돈 갚으라고 하는 유대인[*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저렇게 뾰족한 모자를 유대인이라는 징표로 쓰고 다녀야 했다.], 짜증내는 [[기사(역사)|기사]] ||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주로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성경에서 예수의 사형이 결정될 때 유대인들이 외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__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__ /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태복음 27장 24~26절. 개역개정판)]가 가장 유명하다. [[십자군 전쟁]] 때도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들이 있으면 그냥 쳐죽이고 재산 빼앗는 일은 예사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사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또한 이런 증오가 투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일:Burning-Jews.jpg|width=100%]]|| || 십자군에게 분살당하는 유대인을 그린 중세 삽화 || [[십자군 전쟁]] 기에는 내부 정화라는 미명 하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등 서유럽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스페인]] 지역에도 로마 시대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건너와 살았다. 그러다 8세기경 [[우마이야 왕조]]가 기존 [[서고트 왕국]] 등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 세력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슬람 세력에 호의적으로 다가갔으며 이슬람 세력도 유대인들의 부와 지식을 눈여겨봤기 때문에 이슬람 지배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이들과 협력하며 여러 특권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이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에서 기독교 박해를 벌일 때 이를 방관하거나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의 이민과 무역활동을 더욱 장려하게 된다. 하지만 [[레콩키스타]]가 진행되고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대부분 쫓겨나면서 유대인들도 보복을 피해 마그레브로 대거 이주해갔으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1469년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개종을 통해 남아있던 이들도 더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유대인에 적대적이었던 스페인 왕실과 교회는 유대인 특별 조사기구를 만들고 첩자를 통해 이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해 보고하게 했다. 조사 후 12년간 수천명의 유대인이 개종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했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까지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한 탄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스페인은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당시 스페인에 살던 수십만의 유대인들은 4개월 동안 개종하거나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칙령에는 유대인들의 재산권을 인정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단서 조항에 금, 은, 화폐와 국가가 정하는 품목은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상 재산 반출도 금지되었다. 명시된 기간동안 떠나지 않으면 모두 처형되었고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했다. 추방의 결과로 스페인계 유대인들은 남동유럽, 마그레브 등으로 흩어지거나 타지역 유대인 공동체에 흡수되었지만, 절반 이상은 유대인의 능력을 높이 사던 [[포르투갈]]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신앙은 유지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금융업을 장악했던 유대인이 거의 다 떠나거나 처형당하여 스페인 왕실은 방대한 식민지 운영과 재정관리에 난항을 겪었고 결국 1557년 [[펠리페 2세]] 때의 [[디폴트]] 선언과 이후 스페인 제국의 몰락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도 스페인의 사례와는 다르게 지역에 따라서 나름대로 [[기독교도|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지내거나 [[높으신 분들]]에게 등용되기도 했다. 특히 [[폴란드]]는 유대인에게 관대한데가 상공업 발달을 위해 호의적으로 대우해서 상당수가 그쪽으로 이주했다. 폴란드에서는 유대인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마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대인의 상공업 종사에도 제약이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 농민은 폴란드인 농노보다 지대 부담을 적게 받았을 정도였다. 한 때 전 세계 유대인의 4분의 3이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거주하였다. 이후 폴란드 분할 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거주하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가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되는데, 러시아 제국에서 [[포그롬]]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하면서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동유럽에 남은 유대인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했다. 현재 재정적인 문제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상당수가 [[개신교]] 계열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분리시킨 신약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것과 그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나 성서적으로나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차라리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빠르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 매우 영세한 규모였다. 중세 말에서 근세 사이 유럽에서 가장 금융업이 발달했던 지역은 엄연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 북서부 [[카탈루냐]] 지역으로 해당 지역의 은행들이 현대 금융업의 시초로 유대인들과 상관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이 [[기독교]]인보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51849551|더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사채업으로 배를 불린 이야기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인 [[보카치오]]가 저술한 책인 [[데카메론]]에서도 수시로 언급될 정도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은행]]인 [[성전기사단]]도 은행업과 더불어, 사채꾼 노릇을 너무나도 악랄하게 한지라서, 열받은 [[교황령]]과 [[프랑스 왕국|프랑스 왕실]]에 의해 14세기 초에 파문을 당하고 깔끔하게 토벌당했다. [[가톨릭]] 교회의 지원 하에 세워진 [[기사단]]의 횡포가 일개 사채업자들을 쌈싸먹을 정도로, 폐단이 범국가적으로 심하게 발생한 것이다. 실상은 유대인 사채업자에 의한 횡포는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나 발생한 거고, 그나마도 후술할 내용처럼 [[기독교]] 신자들이 운영하는 [[은행]]들을 상대로는 게임이 안되는 데다, 자칫 자신들이 박해당할 빌미를 줄 위험때문에라도 대놓고 갑질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경제사학자들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은행들 중 하나인, 1408년에 설립된 산 줄리오 은행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로 보기도 한다. 물론 정설은 훨씬 뒤에 설립된 [[네덜란드]] 정부 산하의 [[공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것이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정도로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끄는 금융업계가 고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은행]]은 단 한 곳도 없었고, 유럽 내에서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은행은 [[중세]]도 끝난 18세기에 설립된 [[로스차일드]] 은행이었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유대인'이라는 편견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유대계 자본이 [[은행|제도권 금융 시장]]에 진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채업을 한 것이고, 당연히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계 자본이 운영하는 [[제1금융권]]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십자군 전쟁]]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끼리 [[사채]]는 금지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유대인끼리의 사채는 금지되었다. 그때는 사채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강해서 자신과 동질감을 느껴지는 사람들끼리는 사채를 하는 것이 터부시되었다. 그래서 고리대금뿐 아니라 저리대금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유대인이나 [[이슬람]]인 등 이교도들에게 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 유대인이 위에 기술된 이유들까지 더해져서 기독교인들의 머리 속에 악덕 [[사채업자]]로 각인된 것이다. 십자군이 돈이 부족하면 유대인한테 빌리든지 뺏든지 했던 것도 이의 연장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이는 이 당시 기독교인들끼리, 또 유대인들끼리 내부의 소속감이 얼마나 컸으며, 반대로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시사해준다. 근데 뭐 당시 기준으로 말하자면 [[중세]] 유럽에선 '기독교'란 한국에서 '검은 머리'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표현이었다. 극소수 유대인이나 기타 종교인이 있는 거고 기독교는 그냥 '일반 국민 기본값'이다. ||[[파일:external/media-1.web.britannica.com/8469-004-663DBC17.jpg|width=100%]]|| || [[마이모니데스]] || 한편 이슬람권에선 일반 국민 기본값이 무슬림이었고,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종교를 믿는 집단은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인정하고 제때 [[지즈야]]만 낸다면 딤미 혹은 아흘 알 키탑 (성서의 민족들)으로 존중되었다. 11세기 [[파티마 왕조]]에선 사다카 이븐 유수프 알 팔라히와 아부 사아드 등의 유대인 와지르 (재상)을 두기도 했고, 마이모니데스는 살라딘의 주치의였다. 몽골계 특유의 능력주의이던 [[일 칸국]] 역시 [[https://en.wikipedia.org/wiki/Sa%27ad_al-Dawla|유대인 와지르를 두었다.]] 18세기와 19세기가 되자 서유럽에서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감소하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들어서 유대인들도 지역사회에 활발하게 융화되어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도 여러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 재벌이 된 것도 19세기 초반이며, 19세기 후반 [[대영제국|영국]]에서는 [[성공회]]로 개종한 유대인 정치인인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딱히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당시 전 분야에 걸쳤던 유럽계 유대인들의 눈부신 활약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살아남아 결국 [[홀로코스트]]가 일어났고,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고 추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