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림(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해외 망명 == 유림은 협동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대구에서 정진탁(鄭振鐸) 등과 함께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또한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여러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다 다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모은 그는 1918년 대규모의 암살, 파괴를 도모했다. 구체적인 암살 파괴 계획의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5년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조직하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 운동 발발했을 때, 유림은 독립선언 선포에 협력했고 협동학교 출신인 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안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가서 이상룡, 김동삼 등과 협의해 독립군 양성 문제를 논의한 뒤 군정서 특파원의 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했다가 봉천에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한편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화영(유림)이 대정 8년(1919년) '제령 위반' 죄로 도주하여 중국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는 유림이 3.1 운동에 관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또한 유원식의 <나의 아버지 유림>에 따르면, 유림은 3.1 운동 직후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요중현에 정착했다가 한꺼번에 땅을 전부 매각 처분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만든 후 어느 날 홀로 머나먼 길을 훌쩍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유림은 3.1 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서로군정서에 가서 비밀특파원의 임무를 띄고 2차례 국내에 입국한 후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의 봉천성 요중현으로 가서 정착했다가 봉천에서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봉천에서 구금된 유림은 곧 풀려났고, 1920년 말에 베이징에 가서 신채호, 남형우 등과 함게 독립운동가들의 결집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중국인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金正墨), 남형우 등이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는 데 관여했다. 천고는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고양하기 위해 한, 중 양국의 지식인들을 겨냥한 월간지였으며, 1921년 1월 천고출판사 명의로 베이징에서 제1호가 발간된 이래 제7권까지 발간되었다. 이후 1921년 상하이로 간 유림은 김규식, 여운형이 활약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1920~1921년 당시 중국의 사상적 지형은 이석증(李石曾) 등의 아나키즘. 주작인(周作人) 등의 인도주의, 리다자오, 천두슈 등의 마르크스주의, 후스 등의 실천학파 등 다양한 사상이 제각기 새로운 세상의 건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이렇듯 다양한 부류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혁명이론을 연마했다. 1922년 봄, 유림은 김두봉이 상하이에서 깁더조선말본을 발간할 때 관여했다. 깁더조선말본은 1916년 김두봉이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글 활자가 없어서 자음과 모음을 새로 만들고 활자를 주조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발간되었다. 하지만 집필한 내용에 대한 반대 견해가 제기되었고 판매도 부진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평판이 좋았고, 김도붕은 1930년 동아일보로부터 한글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