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림(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아나키즘을 체택하다 == 유림은 1922년 9월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가 성도에 간 시기는 이보다 전인 1921년 중반이었다.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 파금(巴金)이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21년 중반 성도에서 <반월보(半月報)>에 3편의 글을 발표했고 그 중 하나는 에스페란토를 소개한 것인데, 얼마 후 그 잡지를 들고 고씨 성의 조선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조선인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토를 보급시킬 수 있을 지를 상의하러 왔다고 한다. 파금은 그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웠지만 몇 번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보급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유림이 중국에서 고상진(高尙眞), 고자성(高自性), 고삼현(高三賢) 등의 가명을 사용한 사실로 볼 때 이 '고씨 성의 조선인'은 유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간에서는 유림이 1922년경부터 유교를 버리고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고 보지만, 여러 기록을 봤을 때 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시기는 이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를 보급함으로서 자신들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유림이 저명한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를 찾아가 에스페란토 보급에 관심과 열정을 보인 걸 감안할 때 유림은 1921년 중반 무렵에 이미 아나키즘을 깊이 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림이 기존에 활동하던 상하이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성 성도의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가 아나키즘을 채택하고 이를 숙련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천성은 아나키즘이 유독 활발했고 프랑스 유학이 중국 내에서 가능한 가장 큰 창구였다.[7] 또한 성도고등사범학교는 국립사범학교로 사천성 정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학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1916년부터 조선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서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유림은 이곳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공부하는 한편 불어를 공부하며 프랑스로 유학가기를 희망했다. 유림은 성도고등사범학교 예과 영어부서 학업을 수행했다. 그가 언제 졸업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유림 본인이 직접 기술한 기록[8]에는 '단기 4258년(서기 1925년) 졸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 입학하고 8월에 졸업하는 중국의 학제로 미뤄볼 때, 그는 1925년 8월경에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졸업 후 준비하던 프랑스 유학을 그만두고 국민정부 교무원의 자격으로 남중국 교육 시찰을 했으며, 광둥으로 가서 김원봉 등과 함께 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간부 및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창설하여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 선전하며 활동하다 대구에서 방한상, 신재모 등이 진우연맹을 결성하자 이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고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기 위해 비밀 공작을 추진했다. 진우연맹은 1925년 9월 아나키스트들이 대구에 모여 아나키즘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일제 경찰은 1926년 7월 진우연맹 요인들을 체포한 뒤 이들이 아나키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군자금 모집 및 파괴 음모, 요인 암살을 위해 파괴단을 조직했으며,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할 폭탄은 상하이에 있는 민중사의 '고백성'에게 위촉하여 사오도록 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고백성은 유림의 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림은 봉천으로 가서 중국 국민당원들과 협의하여 한,중 혁명세력의 합작에 노력했다. 이후 유림은 광둥으로 갔고 광동기계공인총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25년 6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일어났던 광둥 노동자들의 홍콩과 광저우에서의 대규모 파업에 참가했고, 광동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에도 관여했다. 이후 우한으로 가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모색했고, 1927년 1월 3일 노동자들이 한커우 영조계 회수 투쟁을 벌일 때 참여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림은 생디칼리슴 운동의 맹장으로 활약했고 십만 공인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아나키즘의 이론적 모색 및 고양을 위해 생디칼리슴과의 연계를 꾀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무정부 내지 강권폐지를 위한 아나키즘의 발전적 모색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을 중요시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