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림(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유림은 출소 후 즉시 만주로 피신했고, 1938년에 변장한 채 남, 북만주를 순회하며 남아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재편성에 노력했다. 1940년에는 베이징, 천진 등지에 머무르며 중국인들과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에 노력했으며, 1941년에는 일본이 천진의 각국 조계를 점령하자 천진을 탈출하고 옌안에서 며칠간 머물며 마오쩌둥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때 농촌 중심의 해방구를 통한 중국 특유의 혁명방법론에 많은 부분 공감을 표했지만,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노선 차이는 분명히 했다고 한다. 이후 1942년에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체류하면서 한국독립군의 원조 문제를 토의했고, 그해 10월 충칭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세했다. 1942년 10월 20일, 유림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피선되었고 10월 24일 당선증을 교부받았다. 이때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대표 자격이었으며, 유림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된 아나키스트 유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을 대표하여 참여했다. 유림은 1943년 2월 16일 외교위원회의 외교연구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4월 10일 조소앙, 신익희, 김성숙, 엄항섭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43년 10월 14일, 유림은 제35차 회의에서 안훈(安勳), 박건웅 등 5명과 함께 '건국강령수개에 관한 안'을 제안했다. 이후 '대한민국 건국강령 수개의원'으로 최동오, 조소앙, 강홍주(姜弘周),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피선되어 활동했다. 건국강령수개위원회는 4차례에 걸쳐 회의를 가졌는데, 유림은 건국강령에 대하여 아무 제약 없이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5월 10일, 유림은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해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충원(金忠元),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김규광(金奎光),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김순애, 한국청년회 대표 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추대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 외세 간섭 배격 등의 강연과 토론이 있었으며, '동맹국 영수에게 보내는 전문'을 '한국 각 혁명단체연합 재중국자유한인대회' 명의로 보내고 주석단에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한국애국부인회, 한국청년회를 병기했다. 전문의 개요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전후 한국의 국제 보호설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동맹국의 대일 작전에도 해가 되므로 반대", "동맹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며 반일 대혁명을 적극 수행", "물자 원조와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 지위 인정 요구" 등의 내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