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목 (문단 편집) === [[형사취수|취수혼]] 등 성문화 === 지역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목민은 혼인 시 여자가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신랑 측 집안에서 대가로 많은 선물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신부는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관계로 한번 취한 신부는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들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娶嫂婚)의 전통이 많다. 취수혼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족 간의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목적[* 다만, [[몽골]]은 [[형사취수|취수혼]]말고도 결혼동맹을 유지하거나 새로 동맹을 맺기 위해, 부족 내에 마땅한 여자가 없으면 추장의 아들들끼리 [[의형제]]를 맺는 의식인 [[혈맹#s-2.1|안다의 의식]]이 있었다. [[삼국지]]에서 묘사되는 일반적인 의형제와는 달리, 서로 간에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가 있기도 하고, 그런 거 없이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는 [[칭기스 칸]]과 [[자무카]]의 관계가, 전자는 [[이성계]]와 [[이지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과부가 된 여성의 생존과 인권, 또 유목인 공동체의 와해를 막는 등의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지금은 법으로 해결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프리카 등에서는 아직도 부족들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칼과 창 대신 총을 들고.] 이웃한 부족 간 관계는 대체로 험악했고 이를 혼인으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취수혼의 전통은 유목민뿐 아니라 알래스카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농경 문명에선 보통 여자는 노동생산력이 없으면서 식량소모를 늘리기 때문에 여자 쪽에서 혼수를 하는 풍습이 많지만 유목민에겐 여성도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데다 인구생산이 더 절박한 문제인 관계로 반대의 풍습이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장남이 신부를 데려오면 이후 형제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결혼을 못 하거나 좀 하자가 있는 여성을 싸게 데려오든가 형이 죽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 나오고 만다. 다만 이러한 풍습이 [[이누이트]]에게도 있다고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데 유목민이라고 죄다 이런 게 아님을 알아두자. 이누이트 인들은 보수적이라 취수혼 같은 건 없었다는 건 아니라 극히 일부 지역, 남자가 적어서 자칫하면 그 부족이 아예 절멸할 상황같이 어쩔 수 없이 이런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이고, 이런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면 많다. [[포르투갈]]이라든지 [[파라과이]] 같은 나라도 전쟁이나 여러 이유로 남자 인구가 너무 줄어서 이런 상황이 되면 노예같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고대 로마]]에서는 귀족 여성들이 남성 노예들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애완동물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줘 백인 자유민 여자들과 맺어지게 했다.[* [[파라과이]]는 [[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하면서 남자들의 수가 크게 줄어서 [[일부다처제]]를 정부에서 용인해줄 정도였고,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맞아서 남자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탐험이나 무역에 종사하여 여자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해진데다, 이들이 더러 항해 도중에 사고나 [[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상류층이라도 [[XX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백인 아니면 어떠냐, 남자 구실만 하면 그만이지]]하는 식으로 타 인종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파라과이는 자기들이 정복했던 [[과라니족]]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만큼, 인종 문제에 있어서 [[남아메리카]]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역시 [[인도인|인도계 사람]]이 [[안토니우 코스타|수상]]으로 등극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인종차별]]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다.] 허나, [[몽골 제국]] 수립 이후 [[칭기스 칸]] 본인의 어머니가 취수혼을 당해 혈통 논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기에, [[몽골]]에서는 이 풍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내를 이방인에게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나 이는 특정한 부족의 독특한 풍습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무리하다. (현재 티벳의 어떤 소수민족들은 이런 풍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해도 폐쇄된 곳에서 동족혼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늘리기 위한 것으로 인류학적 해석되고 있으며, 단순히 성문화가 문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마르코 폴로에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몽골에는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 하는데, 유목민들은 남녀의 주거 지역까지 나눌 정도로 성문화에 엄격했다고 한다. 애초부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여러 학자에 의해 신빙성이 의심받기 때문에, 이걸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중국]]을 방문하고 쓴 것이라고 인정하는 편이지만, 전근대시대 기행문들이 그렇듯이 [[동방견문록]]에도 [[코끼리]]를 낚아채가는 거대한 새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등의 과장된 부분이 많아서, 그 내용을 100% 다 믿기는 어렵다.].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걸핏하면 처녀나 남의 부인을 납치해와서 자기 부인이나 첩으로 삼는 일도 잦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칭기스 칸]]의 어머니 [[호엘룬]][* [[메르키트|메르키트족]]에게 시집가던 [[호엘룬]]을 [[칭기스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납치해서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과 부인인 [[보르테]][* [[칭기스 칸]]이 [[메르키트|메르키트족]]의 기습을 받았을때 납치당하여 강제로 메르키트 장수인 [[칠게르]]의 부인으로 들여보내졌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아들 [[주치(몽골 제국)|주치]]를 임신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치는 평생동안 혈통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그 후에 자신을 구출하고자 남편이 자기 친구인 [[자무카]]와 함께 메르키트족 마을을 공격하자, 즉각 자신을 [[강간]]한 칠게르를 죽여버리고 남편에게로 되돌아갔다.]의 경우다. 이런 납치혼 악습은 칭기스 칸이 엄금하면서 [[몽골]] 내에서는 근절되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를 [[알라 카추]]라 하여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