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목 (문단 편집) === 전투력 === [include(틀:상세 내용, 설명=유목민족 전투력의 비결과 원리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한, 문서명=스웜 전술, 문단=3)]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동물)|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이들은 사냥과 말에 익숙한 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유목민들은 척박한 땅에서 맹수들을 상대하고 다른 유목민 부족들의 침공을 방어해야했기에 가족과 가축을 지키기 위한 승마술과 사냥술(궁술)이 생존을 위한 기본 수단이 되는 관계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기마 병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말타기나 사냥을 넘어 완전히 군사적 훈련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이 [[기병]]이라는 [[군사특기|병과]]는 탄생시점부터 [[기관총]]과 [[전차]]가 등장하는 [[1900년대]] 이전까지 인류 최강의 전투 병과였다. 가령,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유명한 [[폴란드]]의 [[율란]] 창기병대는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부대가 궤멸되어 해체될 때까지 [[폴란드군]]의 최정예 부대로 손꼽혔다. 비록 20세기 이후로는 무늬만 창기병대인 첨단 무기로 무장한 기계화부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관총 등의 무기나 장비를 [[말(동물)|말]]이 가진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해 적지적소에 전개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전근대시대 기병들마냥 정말로 적의 보병들에게 기습적으로 돌진해서 짓밟아버리는 전술도 가능했다. [[나치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 초기에 보병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율란 창기병대의 차징에 궤멸되기도 했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정예 부대를 양성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다. 예시로 든 [[폴란드]]의 경우, [[중세]] 시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기부터 [[립카 타타르]]라고 불리우는 [[타타르|타타르족]]의 분파[* [[티무르 제국]]의 건국으로 인해 [[리투아니아]]로 망명한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온 [[타타르|타타르족]] 난민들의 후손이다.]를 자국에 이주시켜서 기병 양성에 필요한 노하우를 얻거나, 이들을 직접 징집하는 식으로 기병을 확충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정주 농경 민족은 이런 수준의 전사를 농사짓던 사람들 무장시킨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직업 군인을 양성해야 했다. 거기에 오늘날 소총수 훈련은 2주에서 4주면 끝인 데 반해, 고대에는 기마병을 훈련하는 데 최소 수년이 걸렸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궁병을 기르기 위해 걸리는 훈련 기간이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면서 일반적인 농민도 배우기 쉬운 [[총기]]나 [[화포|대포]] 같은 고성능의 화약 무기가 등장 함에 따라 부유한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차이는 더욱 더 벌어졌다. 결국 유목 민족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역사 속으로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선술한 [[폴란드]]의 경우처럼 유목민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으로 기병을 충당해야 했다[*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으로, [[그란 콜롬비아]]의 건국자인 [[시몬 볼리바르]]도 독립운동 당시에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근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물라토]]계 유목민인 [[야네로]]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이들 중 야네로계 군벌의 수장이던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는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뛰어난 성과로 인해, 훗날 베네수엘라 부통령을 거쳐서 대통령으로 영전하기도 했다.]. 반면 유목 민족에게 승마술과 사냥술은 일상생활이기에 전원이 궁기병이었다. 그로 인해 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유목민들의 군사적 역량은 위협적이었다. 규합하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규합만 했다 하면 정말 소수의 유목민에게 압도적으로 다수인 농경 제국이 매번 탈탈 털리기를 반복했다. 더구나 강력한 무력을 생산하기 쉬움+생산력이 떨어짐 이 두 가지 요소가 겹쳐서 대부분은 약탈민족[* 그들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만큼 상당히 권위적이었다. 몽골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사람으로 헛소문이 퍼진 칭기즈칸도 노예를 사용했으며[[https://books.google.co.kr/books?id=dYSYBgAAQBAJ&pg=PT125&lpg=PT125&dq=&source=bl&ots=Q8YxVvTx8l&sig=ACfU3U2C3Aluj1DJ3hq1PtJGzZ7h-lnVEQ&hl=ko&sa=X&ved=2ahUKEwjV892hoLjqAhVEw4sBHUX0C4A4ChDoATACegQICRAB#v=onepage&q&f=false|#]] 만주인들은 오히려 만주인들이 그들 귀족에게 노예를 자칭했다.[[https://baike.baidu.com/item/%E5%A5%B4%E6%89%8D|#]] 청나라를 정탐한 서호수의 일기에도 만주인들이 스스로 노예라 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귀족주의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죄다 권위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유목민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성격도 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국들이라서 더 불리한 점들도 있었는데, 우선 영토가 너무 넓으면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워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교통·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싸우기도 전에 행군하다 보급이 끊기거나 토질병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은 역청야전술로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켜서 완전히 맥이 빠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처럼 바다를 끼고 옆에 광활한 지형이 적은 곳은 드물었고, 다른 지역의 세력이 침공할 목적으로 지도를 살피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기에 유럽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평야가 많은 다른 지역들은 개털렸다. 가령 [[훈족]]만해도 뻥 뚫린 평야 지대인 [[프랑스]]나 [[독일]], [[동유럽]]은 사정없이 털렸지만, [[이베리아 반도]]로는 가지도 못하고 그 인근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교황]] [[레오 1세]]와의 회담을 통해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물러나야했다. 대부분은 그 막대한 전투력을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쓰지만[* 기본적으로 유목민이 생존권을 걸고 충돌할 대상은 초지를 공유하는 옆 유목부족민이지, 정주민족이 아니다.], 이러한 유목민들을 통합할 권위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시무시할 만큼 극도로 성장하며 이것은 [[게르만족]]조차도 밀어버려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킨 [[훈족]]의 성장이나 [[거란]], [[몽골 제국]] 등 유목민족의 [[중국]] 및 [[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졌다. 특히 [[몽골 제국]]의 경우 [[칸국]]들까지 합치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장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동부 유럽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고대]]에 그들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강력한 지도자에 너무 의존하는 체제다 보니 그 지도자가 사라지면 급격히 쇠퇴했다. 몽골제국만 해도 전신인 카마그 몽골은 갓 세워졌을 때 금나라를 침공해 그들로부터 영토할양과 매년 일정한 가축과 곡물을 받아내고 독립국가 지위까지 인정받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카불 칸 사후 쇠퇴하기 시작해[* 사실 카불 칸 생전부터 타타르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쇠퇴의 감이 없잖아 있었다.] 쿠툴라 칸 시기, 결국 타타르-금나라 연합군에게 몽골 자체가 타이치우드와 키야트로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카불 칸 사후 겨우 대략 '''12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유목민족은 강해지는 것도 한 순간[* 금나라가 건국 후 요나라와 송나라를 박살내는데 겨우 12년이 걸렸다.] 쇠망하는 것도 한 순간이엇다. 더구나 개활지에서는 기병에게 더더욱 답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험한 지역에 주요 도시를 건설하는 민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경제력과 기술력 덕분에 건설한 크고 아름다운 성벽만을 본다면 우주방어가 가능할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근대 이전까지는 병력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사훈련 및 장비에 드는 비용, 보급 문제까지 감안한다면 동원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현대와 꽤 가까운 시대이며 인구가 많았던[*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6천만이었지만 실제 인구는 2배, 3배가 넘는 1억 5천만~2억이었다.] 명의 수도나 주요 도시마저 50만~100만 정도의 인구를 넘는 곳들이 거의 없었고, 총력전 이전까지 동원 가능한 병사가 인구비 1/100임을 감안하면 정주민의 군대가 유목민족보다 압도적인 물량을 과시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본군 역시 임진왜란 때가 일본사로 봐도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쟁이었는데 그게 최대 20만 명이었다. 기술의 한계로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제대로 된 병력이면 그게 고작 만 단위라고 해도 적지 않은 숫자였을 수 있다.[* 실제로 삼국지도 정사는 제대로 된 병력 숫자가 적고 중국사에서도 제대로 된 병력이 15~20만 명 있으면 그걸 가진 사람은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한 편이며 결국 중국 전체의 지배자가 되기도 한다.] 인도사 역시 그리스인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한 전쟁을 보면 진짜 싸움 한번 안해본 농민들까지 끌고 오지 않는 이상 병력이 생각보다 적었다. 위의 이유로 인해 유목민족은 정주민의 군대를 대등하게 상대하거나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기병]] 자체가 무장을 불문하고 일반 [[보병]]보다 우위를 점하기 쉬운 병종인지라, 무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병법에 따라 단순 전력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압도적인 전력을 투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세운 민족들 역시 정복이니 개척이니 하고 다녔던 상대들이라 생각보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며, 유목민족이 제아무리 기병 중심, 인구비례 병사 비율이 높았다고 해도 워낙 무장이 빈약했기에 정주민의 영토를 정복하지 못할 경우 결국 패배를 맛보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대통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같은 근접전에 특화된 병과 운용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왜냐면 중장기병은 돈이 많이 드는데 유목민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유목민 군대에서 경기병이 주력인 거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의외로 작정하고 나서는 정주민 군대에게 패배한 기록이 꽤 많다. [[흉노]], [[오환족|오환]], [[돌궐]] 같은 [[유목 제국]]을 건국한 유목민족들도 결국 중국의 통일왕조에게 패배하여 무너진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전쟁에서 대패할 경우 그대로 부족 전체가 몰락하기 일쑤였다. [[파르티안 샷]]이나 [[스웜 전술]]은 정주민 군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정주민 군대가 만만치 않은 기병전력을 갖추거나, 혹은 [[공성전]]같이 기동력 발휘가 어려운 전장에서 싸울 경우 유목민들의 기마부대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들은 대제국[* 문명의 요람에서 세계 4대 문명으로 알려진 곳들은 물론 아랍, 이란이나 그리스([[오스만 1세]]와 [[오스만 제국]] 참조)까지 유목민들에 의해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덕분에 문명화가 빠르기는 했지만 처음 출발은 청과 비슷했다. ]을 건설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흉노]]가 그 시작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 시대]], [[요나라|요]], [[금나라|금]], [[몽골 제국|몽골]], [[청나라|청]]과 같은 [[유목 제국]]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혼란기와 자신들의 팽창기가 겹쳤으며, 이 시기 정주민의 땅을 비교적 빠르게 점령하여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면서 경기병뿐만 아니라 중장기병들까지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을 정복한 것 역시 유사한 상황. 따라서 대개 어떤 지역의 제국을 깨뜨린 유목민들은 거의 세계 최강으로 봐도 될 정도였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박살을 내고 다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다만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돼 버리는 일이 흔하다. 원래부터 인구도 적은 데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어서 농경민족의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접하고 급속도로 동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민족성을 유지하겠다고 온갖 정책으로 막으려 들어봤자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 전체를 통제할 수도 없고 군주제의 한계 때문에 군주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거나 하여 결과적으로 패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먹혀버리기 일쑤. 또 유목민족은 빠른 성장만큼이나 쇠퇴도 빨라서 [[거란]]의 경우 [[북송]]과 [[금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원나라]]도 그 엄청난 영토가 무색하게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심지어 대제국을 이룬 [[청나라]]도 불과 100년 만에 자기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지금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튀르크|튀르크족]](돌궐) 역시 한때 북중국과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는 한족,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내어줬을뿐더러, 유목민들 중 거의 유이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인]]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유목민족인 [[수우족]] 역시도 [[리틀 빅혼 전투]] 이후로는 상당수가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았다. 심지어 근대 이후에도 기병들은 강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베두인 기병으로 오스만 제국의 근대적 요새들을 점령하기도 했다. 물론 이 양반은 영화 등에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아랍 부족들이 말 타고 설치며 영국군이 오기도 전에 오스만 군을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내는 활약을 했다. 이븐 사우드가 고작 40명의 병력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병빨이 좀 있다[* [[청나라]] 역시 몽골 고원에서 [[준가르]]를 상대할 때 이와 비슷했다.].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창기병 같은 고전적 기병들도 활약했다. [[기병]] 문서 참고. [[보어인]]같은 농경민 출신 역시 환경에 따라 유목민화 될 때도 있었는데 이들도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고대 인도유럽어족 이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사를 짓다가 다른 정착지를 개척하기 위해 이동할 때는 마차에 부녀자들을 태우고 성인 남성들은 말을 탄 상태로 가축과 함께 이동하곤 했다. 이들은 현지 흑인들과 전투를 벌일 때 일방적인 학살 수준으로 승리할 때가 많았으며, 거친 야생 환경에서 적응한 사람들 답게 사격술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후일 [[보어 전쟁]] 당시에도 초창기 영국군 전열보병들이 아무 은엄폐 없이 밀집대형으로 사격하는 동안 은엄폐한 상태로 영국군들을 저격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영국은 대군을 투입하고 보어인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고나서야 보어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