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백만 (문단 편집) == 지도자 시절 == 부산 야구의 대부격인 장태영의 애제자였기 때문에 장태영이 일선에서 물러나 은행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1973년 [[한국상업은행]] 감독 자리에 올랐다. 1976년 그 뒤 준프로에 가까웠던 [[한국화장품 야구단]]의 감독도 역임한다. 1977년에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77년]] 코치를 맡았다.[* [[김일권]]이 [[야사시TV]]에서 술회하기를 김응용 감독이 계속 경기에 내보내지 않자 김일권은 불만이 쌓였고 결국 한일전에서 김일권을 1루 대주자로 내보냈는데 유백만 당시 1루코치에게 들리게끔 욕설을 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김응용 감독은 김일권을 계속 추궁했고 김일권은 왜 비싼 국민세금 들여서 니카라과 대회까지 왔는데도 경기에 안내보내주냐 불만을 표출했다. 그 다음날부터 선발로 내보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서울고등학교 야구부|서울고]] 감독을 1년간 맡았다. 아마 시절 명성도 있고, 야구계에 영향력이 있던 장태영의 애제자라 감독 자리 제안도 몇 번 받았지만, 본인 성격이 감독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많이 거절했다고 한다. [[MBC 청룡]]의 창단 코치로 부임하기도 했고, [[삼성 라이온즈|삼성]]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다시 MBC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이 중도 해임되자 그 뒤를 이어 1987년 후기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역임한다. 나름대로 PO를 두고 접전을 벌였지만, 아쉽게 탈락. 하지만, 접전을 벌인 모습과 5할이 넘는 승률을 인정받아 감독 자리를 제안했고, 결국 감독에 오르게 된다. 본인은 50살까지 코치를 한 후에 감독이 되고 싶다며 계속 거부했지만[* 한번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는 '''부산상고 5년 후배''' [[강병철]]을 찾아가 "나는 수석코치 자리로 족하니, 병철이 네가 감독하라"고 간곡히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병철이 3년 후에 감독직을 물려주겠다는 [[김영덕]] [[빙그레 이글스]] 감독의 감언이설 때문에 빙그레 이글스 수석코치로 계약하면서 무산되었다.] 스승인 장태영이 "이번에도 거절하면 영원히 무능력자로 찍히게 되니 거절하지 말게." 라는 권유를 듣고 결심한 거라고. 그러나 1988년 MBC 청룡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팀 성적이 전기리그 최하위, 후기리그 6위. 팀도 아니라는 평가를 받던 [[태평양 돌핀스|태평양]]보다 겨우 반 보 앞선 성적이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팀 선수들에게 자율을 주던 모습이[* 당시 개성이 강했던 [[MBC 청룡]] 선수들이 워낙에 자율을 강조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유백만의 전임자였던 [[김동엽(1938)|김동엽]]은 선수단의 투표로 인해 해고됐고(...) 유백만의 후임으로 부임한 [[배성서]]는 강압적 태도로 선수단을 휘어잡자 투수 [[정삼흠]]으로부터 "여기가 무슨 공산당입니까?"라는 항명을 대놓고 들었을 정도로 선수들의 입김이 센 팀이었다. 원년 서울 연고팀답게 이른바 '서울 깍쟁이'가 많고 통제가 어렵다는 이미지는 청룡의 후신인 [[LG 트윈스]]로 어느 정도 이어졌다.] 다소 나약하게 비춰졌다고. 그 뒤 다시 삼성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골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