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봉 (문단 편집) == 정사 == 본래 성은 구(寇)씨였지만 유비의 양자로 입적된 뒤[* [[관평]]은 연의에서 [[관우]]의 양아들이라고 나왔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친아들이었다. 그러나 유봉은 정사에서도 양아들이 확실하다.] 성이 유씨가 되었다. 원래 양자는 같은 성씨 중에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유봉은 드문 경우이다. 유봉이 완전히 유씨와 무관하지는 않다. 장사(長沙) 유씨(劉氏)의 조카라는 기록으로 보아 모계로 유씨의 혈통을 이었을 것이다. 장사 유씨는 [[광무제]], [[경시제]]를 배출한 가문이므로(부계 조상 중 황제가 되지 못하여 황실 직계에서 분파하여 집안을 차린 사람이 '''장사'''정왕 유발이다) 혈통적으로는 [[전한]]계 황족의 후예인 유비보다 [[후한]]계 왕족에 더 가깝다. 재밌는 점이 하나 있는데, 유봉의 이름인 봉(封)과 유비의 친자 [[유선(삼국지)|유선]]의 선(禪)을 합치면 봉선(封禪)이 된다.[*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 봉선은 천자(황제)의 제사였는데, 이 때문에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유비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유비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정사의 언급이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냥 정황상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유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그냥 우연찮게 유봉의 이름이 봉이어서 둘째 아들은 선으로 짝을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 애초에 유비는 이미 어린 시절에 황제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 적이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걸로 깔 필요가 있을까 싶다.[* 사실 이런 사례는 [[장제스]] 일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제스의 맏아들은 [[장징궈|징궈(經國)]], 둘째 아들은 [[장웨이궈|웨이궈(緯國)]]인데 經과 緯가 서로 통한다. 장징궈의 적자들은 이름이 샤오원(孝文)·샤오장(孝章)·샤오우(孝武)·샤오용(孝勇)인데 文-武, 文-章, 武-勇이 서로 통하며, 서자인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샤오옌(孝嚴)·샤오츠(孝慈)인데 嚴과 慈도 서로 통한다.] 유비의 입촉 당시 20여 세의 나이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군공을 세웠다고한다. 위략에 따르면 한중 공방전 당시 산을 끼고 내려와 조조의 본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역할을 하며 조조가 이를 갈며 조창을 찾을 정도로 군사적 도발을 했다고 한다. 이후 [[맹달]]과 함께 [[상용]]을 점령하고 수비하게 된다. 이때 유비의 행동이 유봉에게 군공을 주기위한 뜻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맹달이 혼자 힘으로 상용을 점령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유봉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맹달과 화합하지 못해 서로 다투었고 이로 인해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고[* 현대전 이전 전쟁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근세까지의 전투에서 통신수단은 북이나 나팔같은 악기와 깃발, 명령서를 들고 뛰는 병사들이었는데 군악대를 몰수했다는건 즉 맹달의 지휘권을 몰수했다는 뜻이다.]또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봉이 맹달을 침해하고 능멸하니 맹달이 부곡 4천가(家)을 들고 위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상용을 공격하는데, 맹달은 유봉과의 불화로 위에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유봉을 회유하려 들었다. > 고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찢지 않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찢지 않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오랜 친구에게 혼란을 더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에 있는 군주가 현명하고 아래에 있는 신하가 정직하면 사악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권세를 쥐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군주는 물론이고 어진 부친이나 자애로운 친척이라도 충신이 공을 세워서 화를 초래하며, 효자가 인의를 따라서 여러움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문종(文種)ㆍ상앙(商鞅)ㆍ백기(白起)ㆍ효기(孝己)ㆍ백기(伯奇)는 모두 이런 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 > 그들이 이렇게 된 까닭은 골육지간이 헤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육친이 화를 입는 것을 기뻐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은혜의 정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가고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며, 또한 어떤 때는 중간에서 참언을 하여 이간시키므로, 비록 충신이라도 군주의 생각을 바꿀수 없고, 효자라고 하더라도 부친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 > 권세나 이익을 더하려고 한다면, 친척을 바꾸어 원수가 되게 하는데, 하물며 친척이 아닌 자야 어떠하겠습니까? 때문에 신생(申生)ㆍ위급(衞伋)ㆍ어구(禦寇)ㆍ초건(楚建)은 선천적으로 받은 군주 모습의 기질로써 정당하게 후사를 계승했어도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현재 그대와 한중왕은 길에서 만난 사람일 뿐입니다. 친분의 관계에서 보면, 그대는 뼈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권세를 차지하고 있고, 명의상으로 보면 군주와 신하 사이라고 할수 없지만, 높은 지위에 있으며, 원정할 때는 한쪽을 책임지는 위엄이 있고, 주둔할 때는 부군장군의 칭호가 있는데, 이것은 멀고 가깝건 간에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유선(삼국지)|아두]]를 세워 태자로 삼은 이래 식견있는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일 신생이 자여(子輿)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진에서 도망 나와 주무왕에게 자리를 양도 받아 오명 계획을 들었다면 부친에 대한 비난이 빛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소백은 다른 나라로 달아났으므로 후에 들어와 패자가 되었고,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으므로 끝까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것이지 유독 현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 > 지혜가 귀한 것은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고, 고명한 식견이 존중되는 것은 사태를 통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한중왕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밖으로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면 마음은 공고해지고, 의심이 생기면 마음은 두려워지게 됩니다. 혼란이나 재화가 발생하고 만들어지는 것은 일찍이 계승자를 폐위시키고 세우는 사이에서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인정은 관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한중왕에게 참언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즉 의심은 형성되고 원한이 알려져 순식간에 폭발 할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먼 곳에 있으므로 잠시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위나라 대군이 전진한다면, 그대는 근거지를 잃고 귀환하게 될텐데, 저는 사사로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과거 미자(微子)는 은(殷)나라를 버렸고, 지과(智果)는 일족과 헤어졌는데, 재난을 피하고 화를 등지기 위해서 모두 이와 같이 한 것입니다. > > 지금 그대가 부모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예가 아니며, 화가 장차 이르게 될 것임을 알면서 그곳에 머무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바른 것을 보고 따르지 않고 의심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스스로 장부라고 부르면서 이 세 가지를 행하는 것이 어떻게 귀하겠습니까? 그대의 재능으로 [[유비|몸]]을 버리고 동쪽으로 와서 나후(羅侯)를 계승한다면 가까운 사람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북쪽으로 신하라고 하며 군주를 섬김으로써 군신의 기강을 바르게 한다면 옛 주인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분노하며 혼란을 초래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이나 멸망을 면하게 한다면 헛되이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방금 선양을 받고 어떤 사심도 없이 현명한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덕을 갖고 먼 곳에 있는 자를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 > 만일 그대가 마음을 돌려 위나라에 의지한다면, 비단 우리와 동료가 되어 3백 호의 봉록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나국(羅國)의 뒤를 이을 것이고, 응당 진일보하여 큰나라를 영지로 삼도록 하여 초대 군주가 되게 할 것입니다. 폐하의 대군은 이미 전쟁북을 두드렸으며, 촉과 오를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완(宛)과 등(鄧)으로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두 적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군대는 돌아올 기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 기회에 일찍 좋은 계획을 결정해야 합니다. 《역경》에 `고귀한 인물을 보면 좋은 점이 있다` 라는 말이 있고, 《시경》에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실행해야 합니다. 현재 그대는 노력해야만 하며, 호돌(狐突)처럼 문을 닫고 나가지도 않으면서, 그대를 보좌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유봉은 일단 맹달을 공격하려 했지만 신의가 배반하여 전세가 기울어짐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성도로 도망쳐온 유봉은 맹달을 욕보인 것을 문책당했으며 또 과거에 [[관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군요청을 거절한 것도 문책당했다. 또한 [[제갈량]]은 관우가 죽은 후 유봉이 강맹(剛猛)[* '强猛'과 뜻이 같은데 '매우 굳세고 사납다'는 뜻이다.]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보고 후환이 될 것을 걱정했고 유봉을 제거할 것을 권한다. 결국 유비는 유봉을 자결케 한다. > "[[맹달|맹자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유봉은 죽을 때 맹달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 했다. 유비는 유봉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비와 유봉은 입양관계긴 해도 부자지간이었는데, 상식적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젊은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유비 역시 유봉을 양자로 삼을 당시에는 유봉을 상당히 전망있게 보고 호감을 가졌을 것이고 유봉이 주변 사람들과 반목하는 사납고 굳센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때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해서 자신이 아들로 삼은 자가 자신의 양자라는 자리가 정치적으로 작용해 목숨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으니 실로 씁쓸했을 것이다. 유봉의 아들 유림은 촉에서 아문장군까지 지내며 멸망때까지 살아남았는데 그 후 하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참고로 맹달의 아들 맹흥도 동시에 부풍으로 이주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