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시민/일생 (문단 편집) === 경기도지사 낙선 === '''국민참여당 창당''' 유시민은 과거 [[개혁국민정당]]→[[열린우리당]] 출신들, [[참여정부]] 시절의 청와대 참모들, 그리고 참여정치실천연대 출신들 등을 규합하여 2010년 1월 17일 [[국민참여당]]을 창당했다. 국민참여당은 과거 유시민 본인이 창당했다가 해산시킨 [[개혁국민정당]]을 계승하였다. 개혁국민정당과 마찬가지로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한 참여를 표방했다. 국민참여당은 2011년 12월 4일 통합진보당에 통합되며 해체될 때까지 23개월간 지속되었다. '''경기도지사 출마''' 유시민은 2010년 6월 2일에 치뤄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5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는 민주당의 [[김진표(정치인)|김진표]] 후보와 맞붙어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하지만 애초에 [[민주당(2008년)|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한 지역씩 주고받는 연대 방식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한 자리가 아쉬운 민주당과 경선을 통해 단일화하는 방식을 고수해서 정치적 권모술수를 적극 활용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마키아벨리스트]]라는 비난도 받았다. 선거 본선에서도 막판에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가 사퇴하면서 단일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때 심상정이 막판 후보에서 사퇴하며 완전히 김문수 대 유시민 싸움으로 갔음에도 졌는데, 심상정은 군소 후보 주제에 늦게 사퇴했다는 명목하에 자칭 야권 지지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다 들었다.[* [[노회찬]]은 선거 완주해서 사표를 만드는 바람에 [[한명숙]]이 졌다고 더 욕을 먹었었고. 한편 노회찬 의원은 2014년 7.30 재보선 때 이때와 비슷한 이유로 낙선하게 된다.] 이러한 잡음 끝에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지만, 현직 경기도지사인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표차가 4%p에 불과했던 점,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후보와의 뒤늦은 단일화로 인해[*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단일화였기에 그때는 이미 투표용지가 인쇄된 후였고 투표용지에는 유시민과 심상정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표기됐다.] 발생한 무효표[* 18만 표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경기도 전체 투표수에서 약 4%에 해당했다. 그러나 유시민 지지자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나온 무효표가 모조리 유시민에게 간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김문수가 살짝 앞섰기에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가 [[김문수]] 당선자와의 격차에 거의 근접할 수준으로 많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 지지자들의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개표 결과가 나온 후에 그의 지지자들은 무효표 논란을 일으키며 재투표하자는 주장까지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효표가 100% 유시민에게 갔다 하더라도 김문수의 득표가 앞서기 때문에 투표 결과는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당 대표 취임, 2011 김해 보궐선거''' 2011년에는 국민참여당 대표에 취임하여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상남도]] [[김해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의석을 확보한다면 이전까지의 패배를 만회하고도 남을 의미 깊은 선거였다. 김해시는 국민참여당의 모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부울경|PK]] 중에서도 민주당 지지세가 제법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지금도 PK에서는 손꼽히는 민주당계 강세 지역이다. 20대 총선에서 김해시 지역구는 모두 더민주 후보들이 당선됐고, 김해시장도 더민주 소속이다.]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강하게 주장되었던 김경수에게 '김해는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만큼 국참당 후보가 범친노단일후보로 결정되어야 한다'[* 민주당이 친노를 축출하면서 이에 치를 떨고 유시민을 필두로 민주당에서 빠져나간 부류가 참여계였다. 한편, 김경수는 노무현의 최후까지 같이해온 사람 중 하나였기도 했다.]란 주장을 하며 후보 단일화를 압박했고, 이마저도 단일화 경선에서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잇달아 판을 깨는 등 수없이 많은 어거지 끝에 결국 이봉수를 후보로 내세우는데 성공하고 원내 진출을 꿈꾸었으나 [[김태호(1962)|김태호]] 후보에게 밀리며 좌절되었다. 김태호는 경남도지사 출신에 최연소 총리 후보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음에 반해 이봉수는 김해 출신이라는 점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력은 정당원으로서 후보 뒷바라지가 전부. 민주당 측에서는 여론조사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야권분열, [[이강철(정치인)|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권양숙 여사, 민주당이 유시민을 죽이려 든단 모함 끝에 불출마한 김경수, 막판 이해찬과 [[문재인]]의 중재에 따라 단일 후보를 양보한 곽진업 등의 희생이 있었기에 단일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유시민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민주당측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이인영은 유시민이 저런 사람이었냐며 치를 떨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737|#]] 이때까지만 해도 높은 인지도와 나름의 팬덤을 바탕으로 야권 대권 주자 1위를 굳건히 지키던 그였으나 그것마저도 [[손학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