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유언/실존인물/동양 (문단 편집) ==== 20세기 ==== |||||| '''20세기'''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한스럽도다![* 유언을 하고 바로 죽진 않았고, 눈을 감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하루 정도 더 살아있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공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저희가 이루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홍장]] ||1823.2.15~1901.11.7 ||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서태후]] ||1836.1.17~1908.12.8 || ||남북 통일은 내가 평소 뜻하던 바이다. 여러 벗들은 부디 작은 일로 국가를 그르치지 말라. ||[[쑹자오런]] ||1882.4.5~1913.3.22 || ||그 놈[* '그 놈'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불명확한데, 위안스카이 일가는 [[홍헌제제]]를 부추긴 장남 위안커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이 날 해쳤어![* 죽기 바로 전에 남긴 말. 정치적 유언은 1914년 신약법 29조에 의거하여 [[리위안훙]]을 대총통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위안스카이]] ||1859.8.20~1916.6.6 || ||나는 안될 것 같소. 지금부터의 길은 아직도 매우 길다오. 나는 당신과 애들에게 미안하오. 쯔량, 쯔안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애써 키워야 되겠소. 인재가 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소원이지만 안된다 해도 억지로 하지 마오. 쯔원은 미국에서 배우고 있으니까 자주 편지를 보내 문안해주시오. 그는 희망이 있는 애요. 나머지 세 자매 중 결혼하지 못한 것은 메이링 뿐이오. 메이링은 당연히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오. 그애는 자질이 총명하기 때문에 친구를 선택할 때도 신중히 하기 바라오. 아이링은 큰언니로써 많이 힘써야 하고. ||[[쑹자수]] ||1853.2.17~1918.5.4 || ||저는 이제 일흔이나 되었습니다. [[신해혁명|신해년]]에 죽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습니다. [[장훈복벽|정사년]]에도 죽어야 했는데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너무나 늦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죽는다고 어찌 저의 고통이 끝나겠습니까? 아아! 황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했습니다.[* 병석에 누웠을 때 [[선통제]]가 어의를 보내자 남긴 말. 이 말을 남기고 바로 죽지는 않았고 잠시 회복되는 듯 하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장쉰]] ||1854.9.16~1923.9.11 || ||평화, 투쟁, '''중국을 구하라.''' ||<|2>[[쑨원]]||<|2>1866.11.12~1925.3.12 || ||내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지반을 포기함으로서 평화통일을 꾀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와 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십수년에 거쳐 국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품어온 주의를 결국 완전히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동지 제군이 고군분투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케 하여 삼민과 오권의 주장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대의를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힘에 부쳐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는구나.[* [[반봉사건]] 실패 후 총살 직전에 남긴 말. 함께 처형된 아내의 유언은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나는 그 남편을 위해서 죽는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였다.] ||[[궈쑹링]] ||1883~1925.12.25 || ||나는 평소 역사학을 연구해서 일생동안 수집해온 동서양의 서적이 아주 많다. 만일 이미 몰수했다면 보존시켜 문화에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 총살 집행 전에 남긴 말. 이후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 만세!" 라고 세 번 외친 후 총살되었다.] ||[[리다자오]] ||1889.10.6~1927.4.28 || ||내 상처가 너무 심하다. 잘못될 염려가 있으니 [[장쉐량|쉐량이]]를 빨리 [[선양시|펑톈]]으로 오도록 해라.[* [[황고둔 사건]] 당시 중상을 입고 후송된 병원에서 남긴 말. '쇼와 육군'에 의하면 여섯째 아들을 불러오라는 말이었다고도 한다.] ||[[장쭤린]] ||1875.3.19~1928.6.4 || ||이 자리가 좋겠네.[* 총살당할 자리를 정하고 남긴 말.] ||[[취추바이]] ||1899.1.29~1935.6.18 || ||장례식을 위해 어떤 기념행사 비슷한 짓도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일은 잊고 각자의 생활에 정신을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보다. ||[[루쉰]] ||1881.9.25~1936.10.19 || ||민족의 생존과 쓰촨인의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적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우리 쓰촨군은 하루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 ||[[류샹]] ||1888.7.1~1938.1.20 || ||집이 있어도 못 돌아가고, 눈물을 흘려도 드리울 데가 없고, 법이 있어도 불공정하고, 억울함이 있어도 누구에게 호소하리.(有家不得歸 有淚無處垂 有法不公正 有寃訴向誰)[* 사형 집행 직후 옷자락에서 발견된 절명시.] ||[[카와시마 요시코|아이신기오로 셴위]]||1907.5.24~ 1948.3.25 || ||나는 단지 마오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옥사하며 아내에게 남긴 말.] ||[[허룽(군인)|허룽]] ||1896.3.22~1969.6.8 || ||누명을 쓰고, 근거 없이 죄를 날조해 많은 죄명을 붙였다. 죽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죽더라도 체념할 수 없다. …… 나는 폐인이 되었다. ||[[펑더화이]] ||1898.01.24~1974.11.29 ||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동포를 구한다.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중국을 구한다.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중국을 구한다.[*원문7 反功大陸…解救同胞…反功大陸…救中國…反功大陸…救中國…] ||[[장제스]] ||1887.10.31~1975.4.5 ||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 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 시신은 화장해서 뼛가루를 대륙 곳곳에 뿌려주시오. ||[[저우언라이]][* 저우 총리의 뼛가루는 유언대로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중국 대륙 전역에 뿌려졌다. 이 작업을 이행한 사람이 [[덩샤오핑]]이다.] ||1898.3.5~1976.1.8 || ||[[화궈펑|당신]]이 일을 맡아준다면 나는 안심하겠다. ||[[마오쩌둥]][*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기대대로 4인방을 숙청하지만, [[덩샤오핑]]에 밀려 5년만에 모든 실권을 내주게 된다. 이후 화궈펑은 마오의 생일인 [[12월 26일]]과 기일인 9월 9일에는 항상 마오의 묘를 찾았으며, 개혁개방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은 채 2008년에 숨을 거두었다.] ||1893.12.26~1976.9.9 || ||저의 시신을 과학실험을 위해 기증할께요. 의학 연구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단비대증의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 이틀전 병원에서 한 말로 사망후에는 시신이 후난성 의과대학에 기증되어져 아직까지 보관되고 있다.] ||[[쩡진롄]][* 중국의 최장신 여성으로 신장 243cm로 유명하다.] ||1964.6.25~1982.2.13 || ||이제 나 자신은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살지 모르겠고 언제까지 목숨을 이어나갈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저 대신에 두살배기 딸을 잘 돌봐주세요.[* 사망하기 이틀 전에 주연평 감독과 함께 대만의 한 선술집에서 술에 취한 나머지 울면서 그를 끌어 안으면서 한말. 평소에도 고혈압과 간경화로 병세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과음하여 스스로 건강을 해쳤으며 결국 이틀 후에 본인이 출연한 마지막 영화의 개봉도 보지 못하고 자택에서 각혈을 한 채로 숨진채 발견되었다. 출처는 중국 위키피디아.][* 참고로 주연평 감독은 80년대 홍콩 홈 가족극의 대가로 유명하며 국내에는 호소자 시리즈 1, 2탄의 감독을 맡은 바 있다. 허불료와는 1978년부터 13개의 영화작품을 같이 해온것으로 친분을 쌓았으며 각본을 집필하는 스승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허불료[* 대만 출신의 코미디언 출신 영화배우. 70년대~80년대에 주로 감초 역할로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며 동양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1951.05.20~1985.07.03 ||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민은 마오쩌둥 주석의 영도 아래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물리쳤으며 혁명의 승리를 쟁취했다. 오늘날 혁명은 덩샤오핑, 펑전, 양상쿤 등의 수정주의 도당들에 의해 도둑맞았다. 주석은 [[류사오치]]를 제거했으나 [[덩샤오핑]]은 제거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인민과 국가에는 끝없는 재앙이 펼쳐졌다. 마오 주석, 당신의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유서이다.] ||[[장칭]] ||1914.3.19~ 1991.5.14 ||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어요.[* 총살형으로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한말] ||[[런쉐]][* 중국의 여성범죄자로 광업소 사장의 딸을 공범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71~1993.7 || ||내 이름을 찾아와라. ||[[와룡생]][* 와룡생은 생전에 필명을 매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목 참조.] ||1930~1997.3.31 || ||엄마, 난 아빠랑 엄마가 너무 좋아. 난 정말 아빠, 엄마, 상관이[* 동생.]랑 헤어지는 게 괴로워. 만약 내가 죽으면 꼭 다시 날 낳아 줘. ||주대관[*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이름 표기는 '저우다관'이나, 후술하는 '내게는 아직~'이 '주대관' 명의로 발매되었으므로 이를 따른다. 1987년 [[대만]]에서 태어나 만 아홉살에 소아암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대관은 이 말을 한 바로 다음 날 새벽 사망하였다. 대관이 암과 싸우면서 쓴 시들은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있다(我還有一隻脚)>는 이름의 시집으로 출판되어 현재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에게 읽히고 있다.][* 죽기 3개월 전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아빠, 엄마, 동생아. 내가 죽으면 내가 온 힘을 다해 암과 싸웠다는 것을 암에 걸린 다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전해 주고, 그들에게 용기와 강한 의지를 갖고 암이라는 악마와 맞서 싸워 달라고 전해 주세요."] ||1987.10.29~1997.5.18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