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언/실존인물/서양 (문단 편집) === 1940년대 === |||||| '''194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만세![* 러시아 측 증언에 의하면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한다.]||[[니콜라이 예조프]][* [[NKVD]] 위원장. [[대숙청]]을 주도했으나 본인도 자신이 숙청한 [[겐리흐 야고다|전임자]]처럼 한직으로 밀려난 뒤 숙청당했다.]||1895.5.1. - 1940.2.4.|| ||죽여서는 안 돼.... 자백을 시켜야... 한다....[* 1940년 8월 19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의 얼음 깨는 망치(혹은 도끼)에 맞고 그의 비명을 들은 경호원들이 라몬을 죽이려 하자 했던 말.]||<|2>[[레프 트로츠키]]||<|2>1879.11.7. - 1940.8.21.||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 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프 트로츠키[* 2월 27일 죽음을 직감하고 쓴 듯한 유언장.]|| ||그대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요. 그 끔찍한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할 거예요.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집중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받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주었어요. 누가 했더라도 당신보다 낫지 않았을 거예요. 이 병이 오기 전까지의 우리들보다 어느 두 사람도 더 행복하진 못했을 거예요. 이제는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 없이도 잘 해낼 거예요. 곧 알게 될 거예요. 있잖아요 이제 글도 제대로 못 쓰겠어요. 읽을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내 모든 행복을 당신에게 빚지고 있다는 거예요. 지극정성으로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대해 주었죠. 이 말은 하고 싶어요-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남긴 상냥함 외에 내게 남은 것은 없어요. 계속 당신의 삶을 망치며 살 수는 없어요. 어느 두 사람도 우리보다 행복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V.[* 자살하기 전 남편에게 남긴 유서.]||[[버지니아 울프]]||1882.1.25. - 1941.3.28.|| ||더 이상의 항해가 불가능하다. 마지막 한 발까지 끝까지 싸우겠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본부에서는 함교 인원들이라도 데려오려 했으나 부하들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거부했다.] 총통 각하 만세.||[[귄터 뤼첸스]]||1889. 5. 25. - 1941. 5. 27.||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하지는 않는다! 조국이여. 잘 있거라.||[[소련군]] 무명용사[*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낙서가 적힌 곳은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現 볼고그라드)]]가 아니라 [[벨라루스]]의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 요새다.]||191?. - 1941.7.10.|| ||파시즘에게 죽음을, 민중들에게 자유를(Smrt fašizmu, sloboda narodu)!||스테판 필리포비치[* Stjepan Filipović,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대항했던 크로아티아인 빨치산으로 추축군에게 잡힌 뒤 교수형을 당했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두 팔을 펼치고 당당하게 만세를 부르는 자세를 취한 것이 사진으로 남았다. 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죽기 직전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1916.1.27. - 1942.5.22.|| ||죽는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네. 이 배리모어가 그런 평범한 일이 일어나는 걸 용납할 리가 있겠나.||[[존 배리모어]][* 미국 배우. 손녀로 [[드루 배리모어]]가 있다.]||1882.2.15. - 1942.5.29.|| ||이 새끼들이 저를 뚫고 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해병인 걸 몰랐나 봅니다(The bastards tried to come over me last night-I guess they didn't know I was a Marine).||에드워드 H. 아렌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해병대 병사. [[과달카날 전역]]에서 경계를 서던 중 침투를 시도하던 일본군 부대와 조우했다. 홀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지휘관을 사살해 적을 쫓아냈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1919 .11. 4. - 1942. 8. 8.|| ||새로운 세상에서는 지식과 과학, 예술의 산물이 개인의 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복지와 윤택한 삶을 위해 쓰일 것입니다.[* 고국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니콜라 테슬라]]||1856.7.9. - 1943.1.7.|| ||나의 사랑하는 손, 잘 있거라, 가여운 나의 손이여.||[[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4.1 - 1943.3.28.|| ||이런 범죄 행위를 보고도 묵인한 군대에 속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1878.9.26 - 1943.4.24.|| ||프랑스 만세!||[[마르크 블로크]][* 역사학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쟁 발발 당시 스트라스부르 대학 교수로 53세였는데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마자 대위로 참전했다. 됭게르크 철수 이후 영국에서 제대하여 귀국한 이후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1944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죽기 전, 16살의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걱정하지 마라, 얘야. 아프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1886.7.6. - 1944.6.16.|| ||우리의 영광스런 도이칠란트여, 영원하라(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맨 마지막 순서에 총살당할 때 외친 말. 정확히는 마지막 처형 순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부하인 대위가 그의 앞으로 뛰어와 대신 맞고 슈타우펜베르크가 마지막으로 총살당했다.]||[[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1907.11.15. - 1944.7.21.|| ||어서 와라, 전우들. 우리는 저 포들을 이 해안에서 몰아내야 한다.||[[존 바실론]][* 이 말을 하고 박격포에 맞아 사망.]||1916.11.4. - 1945.2.19.|| ||엄마! 엄마! 저놈들이 날 죽여! 엄마, 쟤들이 날 죽여!||크룰[*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해병. [[일본군]]의 야습에 당해 총검으로 난자당하다가 전우에게 구조되었지만 이내 사망.]||1918? - 1945.2.21.||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1906.2.4. - 1945.4.9.|| ||뒷머리가 끔찍하게 아프군(I have a terrific pain in the back of my head).||[[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 말을 하고 의자에서 앞으로 굴러떨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 사망.]||1882.1.30. - 1945.4.12.||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살아서 조국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는가.[* 루르의 산업시설을 지키기 위해 [[국민돌격대]]에게 제대장을 발부하고 휘하의 장병들에겐 무전 연락으로 자유롭게 항복해도 좋다는 명령. 이 말을 한 날과 사망일은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하기에 기술한다.]||<|2>[[발터 모델]]||<|2>1891.1.24. - 1945.4.21.|| ||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자살 전 휘하 참모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에게 남긴 말. 이후 베어 소령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을 가겠다는 것을 수락한 게 마지막 대화였다고 한다.]|| ||그래도… 잘된 거야. 적어도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죽으니까 그나마 위안이군.||<|2>[[베니토 무솔리니]][* 하지만 무솔리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유언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낮다고 한다.]||<|2>1883.7.29. - 1945.4.28.|| ||나의 가슴을 쏴라!|| ||나의 불멸의 업적과 나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임을 알고[* 남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최악으로.'''] 나는 기쁘게 죽을 것이다.||[[아돌프 히틀러]]||1889.4.20. - 1945.4.30.|| ||언젠가 거짓말은 밝혀질 것이며, 진실은 다시 한번 승리할 것이다. 그때, 순수하고도 순결한 [[아리아인|우리]]는 모두의 위에 서게 될 것이다.||[[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0.29. - 1945.5.1.|| ||내가 하인리히 힘러다(Ich bin Heinrich Himmler).||[[하인리히 힘러]][* 종전 후 영국군이 그를 체포한 후, 신분이 드러날 것을 예상하고 한 말. 이 말을 한 후 입에 숨겨둔 [[청산가리]] 캡슐을 물어 [[자살]]했다.]||1900.10.7. - 1945.5.23.|| ||나는 비겁하게 죽기 싫다. 나의 심장을 쏘아라. 당신들은 역사상 최대 범죄의 공범들이다.||[[피에르 라발]]||1883.6.28. - 1945.10.15.|| ||이거, 죽는 방법 치고 참 더럽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의식을 잃기 전에 남긴 말.]||[[조지 S. 패튼]]||1885.11.11. - 1945.12.21.|| ||두렵다. 나의 숄로 나의 눈을 가려달라.||콘스탄틴 Z. 바실리우[* [[루마니아]]의 [[전범]]으로, 40만명의 유태인 및 소련인들을 학살한 혐의로 [[이온 안토네스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88? - 1946.6.1.|| ||저리 가… 나는 괜찮아.||[[허버트 조지 웰즈]]||1866.9.21. - 1946.8.13.|| ||하느님, 독일을 지켜주소서(Gott schützt Deutschland)!||<|2>[[요아힘 폰 리벤트로프]]||<|2>1893.4.30. - 1946.10.16.|| ||나의 마지막 소원, 그것은 독일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 동서양이 서로 이해하는 것,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영역판은 My last wish is that Germany realize its entity and that an understanding be reached between East and West. I wish peace to the world.]|| ||나는 모든 독일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00만이 넘는 독일군인들이 아버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제 나도 아들들[* 죽은 독일 군인을 뜻한다. 실제로도 카이텔은 무능한 아첨꾼이었을지언정, 자신의 부하들에게만큼은 아버지같이 자상한 상관이었다. 똥군기 같은 것으로 부하들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말단 사병들의 복지까지도 직접 챙겨주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자 수많은 장병들이 탄원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의 인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을 따라간다- 모든 것은 독일을 위해![* 영역판의 경우 I call on God Almighty to have mercy on the German people. More than two million German soldiers went to their death for the fatherland before me. I follow now my sons — all for Germany!]||[[빌헬름 카이텔]]||1882.9.22. - 1946.10.16.|| ||나는 우리 독일 국민과 나의 조국을 열성적으로 사랑했고 봉사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법에 따라 나의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곤란한 시대에 우리 국민들이 오로지 군인 같은 자들에게 끌려다닌 것이 유감이다. 범죄가 이뤄진 일도 유감이지만 나는 여기에 관련하지 않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범죄들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독일이여 영원하라.||[[에른스트 칼텐브루너]]||1903.10.4. - 1946.10.16.|| ||없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냐는 질문을 받고 남긴 말.]||[[알프레트 로젠베르크]]||1893.01.12. - 1946.10.16.|| ||하일 히틀러!||<|3>[[율리우스 슈트라이허]]||<|3>1885.2.12. - 1946.10.16.|| ||오늘이 1946년 푸림 축일([[부림절]])이구만.|| ||언젠간 볼셰비키 놈들이 니들 목을 매달 거다!|| ||불멸의 독일이여 영원하리!||[[빌헬름 프리크]]||1877.3.12 - 1946.10.16|| ||신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한스 프랑크]]||1900.5.23. - 1946.10.16|| ||잘 있거라. 나의 독일이여.||[[알프레트 요들]]||1890.5.10. - 1946.10.16.|| ||나는 억울하게 죽는다. 내 형량은 불공평하다. 하느님, 독일을 보호하소서!||[[프리츠 자우켈]]||1894.10.27. - 1946.10.16.|| ||이 형 집행이 제 2차 대전의 비극의 종언이 될 것이며 그리고 이를 교훈삼아 모든 국민의 평화와 이해가 이뤄지길 빈다. 나는 독일을 믿는다.||[[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892 .7. 22. - 1946. 10. 16.|| ||난 수백만 명이 함께 만들어낸 이 세상의 유령일 뿐이야.||[[알 카포네]]||1899.1.17. - 1947.1.25.|| ||나는 가족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어떠한 부분도 보여주는게 싫어요. 그러니 제발 저의 몸을 화장해서 없애주시겠어요? 가족들, 제발 부탁드려요. 제가 죽고 나서 저를 추모하려는 장례식도 하지 마세요. 제 약혼자가 저에게 6월에 결혼하자면서 청혼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엔 저는 어떤 남자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는 저 없으면 더 잘 살 거예요.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저는 아빠보다 엄마 성향을 더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에블린 맥헤일]]||1925.9.20. - 1947.05.01.|| ||바람은 높아… 이제 날 수 있겠어.||[[라이트 형제|오빌 라이트]]||1871.8.19. - 1948.1.30.|| ||폴란드 만세(Wiwat Polska).[* [[폴란드 인민 공화국|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기 직전에 남긴 말.]||[[비톨트 필레츠키]]||1901.5.13. - 1948.5.25.|| ||나는 발판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이것은 정치 보복일 뿐이야... 나는 내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카를 브란트]]||1904.1.8. - 1948.6.2.|| ||나의 생체실험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맙다.||[[카를 게프하르트]]||1897.11.23. - 1948.6.2.||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호머 헐버트]][*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고, 한국에서 사망했으며 한국의 묘지에 안장되었다.]||1863.1.26. - 1949.8.5.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