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언/실존인물/서양 (문단 편집) === 1950년대 === |||||| '''195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Gook|동양놈들]]은 이 고지에서 아가일을 몰아내지 못할거야.||케네스 뮤어[* 282 고지 전투 당시 아가일 앤 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 1대대 지휘관. 해당 전투에서 전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0228023400503|연합뉴스 관련 기사]]]||1912.3.6. - 1950.9.23.|| ||당신은 아주 낡고 오래된 골동품처럼 내 생명을 보전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이제 글렀어. 마지막이오. 나는 죽습니다.[* 흔히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를 조지 버나드 쇼의 유언 혹은 묘비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https://blizen.tistory.com/95|(참고)]]]||[[조지 버나드 쇼]]||1856.7.26. - 1950.11.2.||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야훼|하느님]]께서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 ||패트릭 번 주교[* 한국명 방일은(方溢恩). 초대 주한 [[교황청]] 대사.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평안도]]에서 사목하다 1949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서울에 남았다가 7월에 체포되어 납북되어 북한의 퇴각과 함께 수용소를 전전하다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춘천 함락 직후 연행되어 같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1953년 4월 생환한 춘천교구장 토마스 퀸란 몬시뇰(한국명 구인란(具仁蘭), 1955년 주교 서임)이 번 주교의 임종을 지켜봤다.] ||1888.10.26. - 1950.11.25. || ||데이지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게.[* 데이지는 제시의 아내였다.] ||[[제시 L. 브라운]][* 미군 내 인종 차별 정책이 철폐된 이후 처음으로 해군 전투비행사가 된 흑인이었으며, 6.25 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미국 흑인 해군 장교이다. [[장진호 전투]] 당시 전투기를 몰던 중 중공군의 공격에 추락, 다리에 비행기 잔해가 박히고 난 후 의식을 잃고 죽었다. 유해를 발견할 수 가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과다출혈과 동상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926.10.13. - 1950.12.4. || ||좋습니다. 나는 멋지게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나의 친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의사가 곧 죽는다고 말하자 한 대답.]||[[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4.26. - 1951.4.29.|| ||나는 우리 국민들의 신앙 속에서 죽는다, 바라는 것은 독일 국민이 이들 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뿐![*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말.]||[[파울 블로벨]]||1894.8.13. - 1951.6.8|| ||하모니…||[[아르놀트 쇤베르크]]||1874.9.13. - 1951.7.13.|| ||제기랄. 이럴 줄 알았어.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죽다니…||[[유진 오닐]][* 희곡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의 저자로 유명하다. 아버지가 순회공연을 다니는 배우였기에 호텔에서 태어났고, 본인 스스로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돌았기에 결국 호텔 투숙 중 사망했다.]||1888.10.16. - 1953.11.27.||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Espero alegre la salida — y espero no volver jamás).[* 영문 : I hope the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프리다 칼로]]||1907.7.6. - 1954.7.13.|| ||몇 년간의 국제적인 경제금융단체들의 지배와 약탈이 있은 후에, 나는 자신을 꺾일 수 없는 혁명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나는 자유화작업을 시작하였고 사회적 자유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사임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국민 편에서 통치하기 위해 돌아왔다. 나는 [[브라질]]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통해 우리의 부를 증진시켜 국민의 자유를 이룩하려고 했으나, 난동의 소용돌이는 시작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브라질 전기 일레트로브라스는 방해를 받아 거의 절망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민중이 독립되기를 원치도 않았다. 나는 브라질에 대한 약탈에 대항해 투쟁했고, 민중에 대한 약탈에 대해 투쟁했다. 나는 맨몸으로 투쟁했다. 증오나 불명예, 중상도 나의 정신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나는 국민들에게 나의 일생을 바쳤다. 이제 나의 죽음을 바치노라.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영원의 길로 나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삶을 떠나 역사에 묻히고자 한다.[* 유서]||[[제툴리우 바르가스]]||1882.4.19. - 1954.8.24.|| ||나의 마지막 작품은 이것으로 끝났소.||[[앙리 마티스]]||1869.12.31 . - 1954.11.3.|| ||이 세상에서 내 할 일을 다 한 것 같구나.[* 수양딸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실제 사망 직전에도 유언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독일어]]'''로 하였고 이를 임종을 지키던 미국인 지인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묻혔다는 야사가 있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3.14. - 1955.4.18.|| ||내 [[안경]]을 주시오.||[[토마스 만]]||1875.6.6 1955 .8. 1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