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언/실존인물/한국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죽기가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내가 죽은 후 내 글은 창강 김택영에게 맡기거라. ||매천 [[황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아편덩어리를 삼켜 음독자살하였다. 아편을 삼킨 직후에 한 말.] ||1855~1910.9.7 ||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 ||1887.10.16.~1910.9.13 ||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고종(대한제국)|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이범진]][* [[이위종]]의 아버지이자 외교관.]||1852.9.3.~1911.1.13 || ||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이용구]][* 이걸 들은 [[우치다 료헤이]]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이라고 말했다 한다.] ||1868.2.14~1912.5.22 ||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화장(장례)|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래서 이상설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재가 바다에 날려졌다.] ||부재 [[이상설]] ||1871.1.27~1917.3.2 ||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겠다.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최후 진술] ||[[김알렉산드라]] ||1885~1918.9.16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경술국치|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조선 독립 만세...||[[유관순]] ||1902.12.16~ 1920.9.28 ||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강우규]] ||1855.420~1920.11.29 ||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이다. 이 자들이 어떻게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냐? ||[[민원식(1886)|민원식]] ||1886~1921 || ||'''정부… 정부!''' ||예관 [[신규식]][* 독립운동가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과 함께 [[쑨원]]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정부 승인받도록 이끄는 데 커다란 활약을 했다.] ||1880.2.22~1922.9.25 || ||대한독립만세! ||[[김상옥]][* 의열단 단원으로 1000명의 일본 경찰과 맞서싸우다 총알이 한 발밖에 남지않아 그 마지막 총알을 자신의 머리에 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 ||1889.1.5~1923.1.22 ||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구별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 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 민족의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一. 전족통일(全族統一)이라 함은 말로 주장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물론 극란한 일이오, 그러나 제일 먼저 주의할 것은 적어도 우리 광복사업에 헌신하려고 자처한 건전분자들은 지중(至重)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운 이상에는 환경의 어떠함을 물문(勿問)하고 다 한데 뭉쳐야 되겠오. 물론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별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사당 혹은 붕당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여하튼 우리도 이 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래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 二. 독립운동은 우리의 제일 중대한 사업인 즉, 이를 기성코자 함에는 하등의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못하게 됨이 사실이오. 바로 말하자면 즉 우리 민족의 체면이나 장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위험성을 가진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광복사업에 대하여 일호라도 이익 있게 보이는 일은 다 실행하도록 주의하여야만 되겠오. 이같이 말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즉 우리가 장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 먼저 기초되는 독립국가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오. 三. 독립운동의 성패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문제이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에 성공코자 하면 우리가 통일적 행동을 하여야 되겠으며 단결되어 일하려면 독립운동이라 하는 전민족을 살리려는 대사업에 목표를 두고 이 일을 진행함에 사개인(私個人) 사이에 교분 혹은 감정관계의 어떠함을 일체 돌아보지 말아야 되겠오. 나의 말한 몇 가지 일이 실행키에 어렵지 않음은 아니나 하려면 아니 될 것은 없고 잘 될 터이오. 이는 다른 말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소. ||백암 [[박은식]][*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B%B0%95%EC%9D%80%EC%8B%9D|출처]]] ||1859.9.30~ 1925.11.1 ||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認准)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수(幽囚)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病)이 심중한 일언(一言)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 지금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中外)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曉然)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순종(대한제국)|순종]][*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해지기로는 순종은 이 유언을 이준구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이준구는 순종보다 한 달 정도 빨리 사망했다.] ||1874.3.25~1926.4.25 || ||네 이놈들! 니들은 내가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왔지? ||월남 [[이상재]] ||1850.10.26~1927.3.29[* 사망 하루 전 병문안을 온 두 제자들에게 한 유언. 이 말을 하고 돌아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일본에게 속았다. ||[[이지용]][* 도박으로 망하고 사망한다. 개명 전 동명이인인 [[이용구]]도 유사한 유언을 남김.] ||1870.10.23~1928.6.30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백야 [[김좌진]] ||1889.12.16~1930.1.24 ||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소파 [[방정환]] ||1899.11.9~1931.7.23 ||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남강 [[이승훈(1864)|이승훈]][* 일제의 방해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하나 성리학적 윤리가 남아있던 당시에는 시신을 해부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던 터라 지켜지 않았을 수도 있다.] ||1864.3.25~1930.5.9 ||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더 이상 남길 말은 없다. ||[[윤봉길]] 의사 ||1908.6.21~1932.12.19 ||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의사 ||1896.1.19~1934.6.5 ||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성재 [[이동휘]] ||1873.6.20~ 1935.1.31 ||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 발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장례)|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단재 [[신채호]][* 그러나 그의 시신은 주변인들의 중론을 따라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었다.--하라고 한 사람은 못해주는데 [[안중근|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됐다--] ||1880.12.8~1936.2.21 || ||[[멜론]]이 먹고 싶소.[* 본래에는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이상의 아내 변동림이 유언을 정정했다.] ||[[이상(작가)|이상]] ||1910.8.20~1937.4.17 ||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선산 같은 데 쓸 생각을 말고, 서울 공동묘지에, [[유상규(1897)|유상규]][*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 안창호의 비서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군이 누워 있는 공동묘지에 나를 묻어주오. [* 이 유언을 남기기 며칠 전에는 [[메이지 덴노|목인(睦仁)]]아! 목인아! 네놈이 큰 죄를 지었구나! 라고 외쳤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1878.11.9~1938.3.10 ||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너희들은 꼭 볼 것이니… ||한서 [[남궁억]] ||1863.12.27~1939.4.5 ||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 ||석오 [[이동녕]] ||1869.2.17~ 1940.3.13 || ||이놈들아! [[아마테라스|천조대신]]보다 하나님이 더 높아! ||[[이기풍]][*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이자 순교자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1865.12.23~1942.6.20 || ||'''내 삶이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 독립운동가로 간도에서 교육 활동과 개신교 보급에 힘썼다. 제자들이 임종 직전 남길 말이 있냐는 말에 대한 질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김약연은 간도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명동학교를 세웠는데 윤동주, 문익환 등이 여기서 수학했다.] ||1868.9.12~1942.10.29 ||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평양 형무소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중 남긴 말.] ||소양 [[주기철]] ||1897.11.25~ 1944.4.21 || ||나는 이제 간다. 나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가지만 조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다하여 곧 바로 자주자립국가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일제에 지배당하였던 기간만큼의 혼란의 시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주자립국가를 이루게 되고 세계 속에 우뚝 솟는 국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만해 [[한용운]][* [[http://m.newspower.co.kr/4628|출처]]] ||1879.8.29~ 1944.6.29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