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언/실존인물/한국 (문단 편집) ===== 1950년대 ===== ||<-3> '''195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 ||학암 [[이관술]][*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사, 정치인.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대표적 학살 가해자인 헌병 중위 심용현이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나?"고 조롱하자 이에 응수한 대답이다. 그리고 바로 학살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민족 만세란 말은 부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902.4.25~1950.7.3 || ||장관님께 내가 죄송해하더라고 전해주게. ||[[채병덕]]||1914.4.17~1950.7.26.||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은 편지를 쓸 당시 상황을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 포스터에서 인용되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이우근[*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문근 사도 요한 신부의 동생으로, [[동성고등학교|동성중학교]]에 재학하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1950년 8월 10일 71명의 학도병만으로 인민군의 진격을 막은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하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고 사후 수습할 때 몸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편지 부분은 당시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에서도 나온다. 극 중에서는 최승현(빅뱅의 T.O.P)이 쓴다. 근데 배역과 실제와는 나이와 학력 등 전혀 맞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이문근 신부는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다. 이우근도 가톨릭계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피난 와중에도 김대건 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 성지를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34~1950.8.11 || ||나는 공산군이 아니오. 나는 석두명[* 석주명의 고향인 [[서북 방언|평안도 사투리]]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아 'ㅈ'를 'ㄷ'로 발음한다.]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 ||<|2>[[석주명]][* '나비 박사'로 유명한 나비연구가. 한반도의 나비를 깊이 연구하고 모든 종류를 정리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만나 그가 평생을 기울여 채집한 나비 75만 마리로 만들어진 표본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가던 중 늦다고 빨리 가다가 대낮에 총 매고 술 먹던 청년과 스쳤는데 부딪힘을 당한 청년이 술김에 미쳐버렸는지 석주명을 향해 "저기 인민군 소좌(장교)가 간다!"라고 하며 붙잡는다. 이에 석주명은 이와 같은 말을 남겼으나 술 먹은 청년들은 말을 무시하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들이나 똑같은 버러지들이지."하며 석주명을 '''총으로 쏴죽이고''' 히히 웃고는 거적에 말아 개천 옆에 유기했다. 결국 그의 해명이 유언이 되어버린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 ||<|2>1908.11.13~1950.10.6 ||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 ||이런 동족상잔의 전쟁을 가져오게 된 것을 누구 탓할 것이 아니다. 3천만의 잘못이다. 특히 민족의 지도자들이 이걸 막아내지 못하고 남북의 통일도 되지 못하여 결국은 동족상잔이 전쟁을 가져오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민족통일을 해야 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 나는 식민통치 때부터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과정에 투신하였고, 해방 후에도 일관되게 민족통일을 주장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기에 때문에 그것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고, 민족통일을 위해서 38선을 넘어 북에까지 갔는데, 민족의 대단합, 민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의 와중에 병으로 누워 소생의 길이 없다. 내가 살아온 생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한 걸음 한 발짝 걷고 옮길 때도 언제나 머리 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갈라진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합작과 통일을 주장해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기필코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신념이자 의지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쓰러지면 조국 통일의 완성은 누가 해 줄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 남도 북도 같은 민족이고 좌익도 우익도 같은 민족이다. 조상과 핏줄이 하나인 민족이 왜 통일을 할 수 없겠는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꼭 해야 한다는 의지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념과 책임감을 통감하고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인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 정권욕에 의해서 통일도 못하고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이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비분을 금할 수 없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합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으로 해서 좌도 우도 아닌 중간노선, 중립노선을 확고히 견지해야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도 보장하고 통일도 이룰 수 있다. 나라와 전체 민족을 위해서는 지도자건 국민이건 자기자신부터 먼저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우리 민족이 겪지 않았어야 할 참화와 재난과 동족상잔을 당하고 보니 원통하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가 걱정된다. ||우사 [[김규식]] ||1881.1.29~ 1950.12.10 || ||소대원을 모두 잃은 데 대하며 무한한 자책을 금치 못한다. 소대원이 잠든 이 고지에서 죽음을 같이하고 속죄하려 한다.[* 자결하기 남긴 유서. 당시 아군의 인명피해도 엄청나서 소대원 중 70명이 전사하고 단 4명만 살아남은 모습에 큰 충격과 더불어 극심한 자책감을 느낀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김용호 중위[* 6.25 전쟁때 경기도 장단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 당시 소위계급으로 임관하여 경기도 북부 장단지구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 제1전투단 11중대 3소대장으로 지휘 하였으며 중공군이 2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포격을 앞세우며 33진지를 공격했다. 이때 그는 '나가자 해병대' 군가를 부르게 하는 등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김 소위가 이끄는 3소대는 결국 중공군의 33진지 장악 시도를 성공적으로 무산시키고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에 진지 내 사격을 요청하는 등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 전공으로 인해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더불어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에서는 2021년 4월 김 소위를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고 전쟁기념관에서는 2023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891.10.11~ 1955.2.18 ||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 ||1891.10.11~ 1955.2.18 ||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김일성|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이정 [[박헌영]][* 1956년 처형 직전 남긴 말.][* 그러나 마지막 약속이자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망 이후 처와 두 아이는 소식이 없다.] ||1900.5.28~1956.12.5 ||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잘못하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리의 귀중한 절개를 훼손당할 염려가 있소. 각자의 처신에 특별히 주의합시다.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소.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주오. ||소앙 [[조용은]]||1887.4.30~1958.9.10 ||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 교수형 직전 남긴 말이다. 이 말에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고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운 후 처형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하 대표적인 조작된 사건이자 사법살인. 자세한 내용은 [[진보당 사건]]을 참고.] ||죽산 [[조봉암]] ||1898.9.25~1959.7.31 ||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 ||[[우장춘]] 박사[* 죽기 직전에 벼를 한번 보고 싶다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제자들이 한국농업연구소에서 벼를 가져와 병상의 박사에게 쥐어주자 한 말. 왜 최후에 흔하디 흔한 벼를 보고 싶어했는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텐데,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쌀이 남아도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후에 통일벼까지 만들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가 컸기 때문에 벼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벼의 이기작은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추위때문에 성과가 나지 않고 있다.] ||1898.4.8~1959.8.10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