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염 (문단 편집) == 분석 == 이 일로 유선은 남의 [[아내]]를 [[네토라레|NTR]]하고 남편을 죽였다는 [[암군]] [[폭군]]이라는 비판과 [[여성]] [[페미니즘|권리를 보장했다는 인자한 군주라는 찬사]] 등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공식적으로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 호씨가 궁중에 남은 것이 유선의 명령이라는 기록도 없고 [[간통]]의 기록도, 증거도 없다. 의심만으로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건 분명 심각한 문제고, 특히 '''[[황제]]가 [[처]]와 [[간통]]했다고 의심했으니 기군망상(欺君罔上)이다.''' 다만 이 정도로 사형까지 가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좋은 의심거리를 남기게 되었다. 처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유선의 속사정 때문이었을 가능성보다는, 유염이 호씨와 싸우는 과정에서 유선에 대해 불경한, 예를 들면 [[팽양]]에 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때렸다고 사형시키는 일은 [[신분]]이 많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신 분을 [[폭행]]했을 경우밖에 없다.] 유염은 이미 이전에도 적절치 못한 발언 때문에 근신중인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무리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고는 하지만 유선이 출생했을 때부터 황제에 오를 때까지 유비의 최측근으로서 옆에서 이를 지켜봤을[* 상술했다시피 유염이 유비 진영에 출사한건 유비의 [[군웅]] 일생 중 꽤나 초반인 예주 [[자사(관직)|자사]] 시절이였다. [[조운]]보다도 유비군 선배이며 유선이 태어날 때 시점에서도 벌써 10년 이상의 짬이 있었던 어마어마한 고참급이였던것. 예주 시절부터 수하였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때 나이가 최소 50대 후반이였다는 것이며 이 당시 촉한에서 그보다 종사 경력이 길었던 신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유염이 의심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 여성이 경조하는 풍습 자체가 중지되었다는 것은, [[비빈]]만 12명을 넘게 두려던 유선을 [[동윤]]이 말렸다는 사실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유선의 평소 행실이 의심스러웠다는 이야기이긴 하다. 어쨌든 유선은 유염의 재판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병사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얼굴은 형벌을 받을 곳이 아니다"라는 판결 자체는 명판결이지만, 이 역시 유선이 내린 건 아니라는 것. [[유선(삼국지)|유선]] 항목에 이 일화가 들어가지 않은 것도 그 이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