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왕 (문단 편집) == 치세 == 유왕 원년(기원전 781년), 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먼저 신후의 딸인 왕후 소생의 희의구를 태자로 봉했다. 유왕 2년(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지진이 일어나 주나라가 망할 징조를 보였다[* 관중이 주나라의 기반이 되는 곳인데, 거기에 지진이 일어났으면 농지가 망가져 경제적 타격이 갔으리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도 경수, 위수, 낙수 등 주나라 천자 직할지의 농업 용지를 공급받는 곳에 타격이 갔다. 또한 기산(岐山)에 산사태가 일어났다[* 단, 이 기산은 제갈량이 중시한 기산(祁山)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기산은 주태왕이 적인(狄人)을 피해 옮겨갔다는 그 기산이다.]. 그리고 그는 숙부인 정 환공을 사도로 봉했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유왕 3년(기원전 779년), 그는 [[포사]]라는 절세 미녀를 얻어 그녀를 총애해 오래지 않아 아이를 얻었다. 그래서 이름을 백복(伯服)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유왕은 그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사기에 의하면 포사는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그녀가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왕은 처음에는 [[비단]]을 찢는 소리가 좋다길래 비단을 찢어가며 웃게 했다. 그래서 포사가 웃기는 했지만, 문제는 비단이 예나 지금이나 여간 비싼 옷감이 아니라 왕실의 재정에 무리가 갔다는 거다. 게다가 포사도 비단 찢는 소리도 갈수록 지겨워해서 더 이상은 이 작전도 써 먹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주유왕에게는 다른 특단의 조치~~뻘짓~~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봉화대]] 신호가 잘못 올라와 제후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 발생했나 하고 우르르 몰려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포사는 그것을 보고 아주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주유왕은 포사가 웃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기세였는지라 봉화를 올리는 것을 남발했다. 그리고 제후들은 거기에 낚여 괜히 여러 번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제후들과 장수와 병사들만 힘들었다. 이후에는 제후들도 또 속을 줄 아냐며 아무리 봉화를 피워도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이 무렵 유왕은 기존 왕비를 내쫓고 포사를 왕비로 임명했고, 이에 기존 왕비의 아버지 신후와 기존 왕비는 이것에 앙심을 품어 견융족에게 주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하여 유왕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제후들은 진짜로 적이 침략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여자 하나에 미친 저런 정신나간 왕이라면 걍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다고 그냥 방치했다고도 한다.]. ~~[[양치기 소년]]이 생각나면 [[기분 탓]]이다.~~ 이에 유왕은 아들과 포사와 함께 황급히 달아났으나, 도중에 여산에서 견융족을 만나 거기서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한편 포사의 최후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지금도 [[미스테리]]이다. 아무튼 그럼으로써 서주는 [[멸망]]하였다. 청화간 계년에서는 서주의 멸망 과정이 좀 더 자세히 나타난다. 유왕은 원래 태자인 [[평왕]]을 폐하고 포사의 아들인 백복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평왕은 서신[* 평왕의 외가이다.]으로 도망가고 유왕은 군대를 보내 서신으로 도망간 평왕을 끝장내려고 했다. 평왕과 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융을 끌여들여서 주유왕에게 반격했고 주유왕을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유왕이 죽었지만 주유왕과 포사를 지지하던 세력은 건재하여 유왕의 동생이던 [[휴왕]]이 괵나라 등의 지지로 등극하게 된다. 휴왕은 재위 21년(기원전 750년) 진문후에 의해 살해당하고 주나라의 내분은 끝이 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